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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jak Nov 10. 2019

Good&Bye.

내내 버리는 중이다.

안 입는 옷들을 버렸고, 크고 무거운 오래 된 책상을 버렸고, 예뻐서 샀지만 쓰지 않는 소품들을, 오래 묵은 습작뭉치, 일기장을 버렸다. 그리고 며칠 전에는 편지를 버렸다.


수십 년 동안 나름의 기준으로 추리고 추려서 모아 두었을 편지들이 서랍 하나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검정 비닐봉지를 가져와서 다시 풀어보지도 않고 서랍채로 쏟아 부었다. 열어보지 않아도 누가 보낸 것들인지 다 기억하고 있다. 문득 너무 보고 싶어서 한 밤에 편지를 쓰다 말고 불쑥 전화를 걸었던 친구, 점심시간 마다 옆 반으로 종종종 편지봉투를 들고 찾아갔던 중학교 동창, 함께 아프리카를 가자더니 아프리카 대신 둘째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꾹꾹 눌러 쓴 손 편지로 전한 대학 동기, 인터넷 카페 어디선가 만난 다정한 인연, 공과 사가 뒤섞인 크리스마스카드, 어떤 것들은 칼칼한 먼지 냄새를 품고 있었고, 어떤 것들은 어제 받은 것처럼 빳빳했다. 

이제는 다시 보지 못하는 인연부터, 당장에라도 달려가 얼굴을 볼 수 있는 인연의 이름들이 편지 겉봉에 새겨져 있었다. 


편지를 담은 검정 비닐 봉투를 꾹 묶어 쓰레기봉투에 눌러 담았다.




나에게 '모아둔 편지'는 감정은 지나갔으나,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서랍 안에 묻어둔 것들이다.

편지 안에 담긴 것들은 분명 소중한 순간이었지만, 나는 몇 년 동안 한 번도 그 서랍을 열어본 적이 없다. 그중 누군가와는 그 이후로도 다른 시간을 공유했고, 누군가와는 다시 본 일이 없었다. 누군가가 지나간 자리에는 또 다른 누군가가 들어왔었다. 흐르는 시절, 단 한 번도 같은 시간인 적이 없었다.

돌아보면 아픈 이름도, 미안한 이름도 있으니 나 또한 그들에게 제각각의 이름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저 모든 것들이 나름의 이름으로 좋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 뭉치의 편지를 버리고, 그 대신 오늘을 써 내려가는 중이다.


편지가 없어진 서랍 안에는 수납공간이 부족해 제자리를 못 찾던 물건들이 자리를 잡았다.

그 물건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한 뼘만큼의 여유가 남았다. 그래서 나는 한 발 더 보폭을 늘릴 수 있었다. 주욱 길게 기지개를 켤 수 있었다. 감사하다.



편지를 버리면서, 그 편지 뭉치들을 사진 한 장으로도 남겨두지 않았다.

대신 몇 해 전 대만 여행에서 찍은 사진을 슬쩍 얹는다.

비 내리는 밤 하늘에 풍등을 날리면서 멀리 날아가는 풍등을 향해 <저도 좀, 행복하게 살게 해주세요.>라고 소원을 빌었었다.

.....나는 그 순간, 행복했었다.


이제 지나간 것들을 남겨두는 대신에 매 순간, 나와 함께 하는 모든 것들을 좋은 것으로 만들어 가려고 한다. 매 순간을 감사하며 사랑하거나 혹시 미운 마음이 들거든 마음껏 가식없이 미워하면서.

그리고 끝이 닿는 어느 날엔 그 모든 것에 고마웠다는 인사를 전하면서 손 한번 꼭 잡고, 와락 한번 안아줄 것이다. 직접 잡지 못한다면 마음으로 전할 것이다.


사는 날들, 어느 한 자락을 함께해 주어서 외롭지 않았다고. 고마웠다고.



좋았던 것은 좋았던 대로, 떠나야 할 것은 떠나는 대로.

Good&Bye. 



*제목은 일본영화 good&bye (한국 개봉 : 굿’바이)에서 차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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