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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jak Nov 18. 2019

금순씨에게 미안해서.

나는 왜 지어낸 이야기를 쓰고 싶은가.

*경고:  이 글은 아무도 물어보지 않은 아닌 새벽에 난데없는 독백입니다. 



나는 왜 ‘지어낸’ 이야기를 쓰려고 하는가? 아닌 새벽에 자문 자답을 해 보려고 한다.


브런치에 올라오는 글은 주로 에세이가 많다. 따뜻한 일상의 이야기, 직장 혹은 결혼생활 등 좌충우돌 이야기, 혹은 삶의 단편에 담긴 통찰 등 다양한 이들의 또 그만큼 다양한 이야기가 이 글공간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다.

나 역시 일기인지 에세이인지 경계가 모호한 이야기들을 제법 꺼내놓았으나, (가슴에 손을 얹고 고백컨데) 솔직히 나는 내 얘기가 재미가 없었다. 

우선 나라는 인간 자체가 재미있는 구석이 별로 없고 그만큼 내 일상도 재미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이들이 내보이는 삶의 진실을 따를 재간이 없었다.  글의 행간 사이사이에 드러난 다양한 삶의 진실들을 고작 얄팍한(있기나 한 건지도 알 수 없는)기교로 뛰어넘을 재간이 없었다.


그냥 해보는 앓는 소리, 혹은 겸손을 가장한 위선이냐고?

단호하게 말하지만 <아니다.>




며칠 전에 <외로움>을 주제로 글을 하나 쓰려다가 덮었다.

지금은 돌아가신 내 이모 이야기였다. 까칠하고, 괴팍하고, 동네 시비란 시비는 다 걸고 다니고, 제대로 된 가정을 꾸리지 못했으며, 어린 자식을 황망하게 잃고 어떤 세월을 살아 냈었는지, 그리고 당신의 마지막은 또 얼마나 세상의 상식에 물음표를 던지는 모습이었는지. 그 짠함과 그 뒤에 드리워진 외로움이 어떤 모습으로 다가왔었는지를 쓰려고 했었다.


결론. 결국 나는 그 모든 이야기를 글로 다 옮길수가 없었다.

내 이야기였다면 나불나불 게다가 조금 분칠을 보태서 그럴싸하게 채워나갔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당신이 돌아가시기 전에 걸려온 전화에 “이모, 내가 한번 갈게요.” 라고 해 놓고, 바로 잊어버리고 노느라 바빴던 못된 조카딸년이 ‘글’ 이라는 이름을 빌어 당신의 삶을 재료삼아 감히 ‘외로움’을 논하는 것은 염치 없는 일이었다.


어떤 문장은 내 눈에 제법 그럴싸해서 스스로 감탄하기도 했다.

어떤 부분은 나 혼자 괜히 울컥해서 눈물바람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내 이야기가 아닌 이상 이런 저런 잣대를 들이대서 제목을 붙이고 주제를 나불거릴 수는 없다. 그것을 이제서야 조금 알게 되었다. 

이 곳에 두어번 적은 적이 있는 가족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구절구절에 담긴 마음은 진심이었으나, 가족을 글감으로 소비한 것 역시 사실이기에 마음안에 양가감정이 조금은 묵직하게 남아있다.

나는 나의 결핍을 남의 삶을 끌어와서 적당히 메꾸고 있다. 


다시 한번, 나는 내 이야기가 재미없다. 타인의 이야기가 백 만배 쯤 재미있고, 위선과 가식 없이 그들이 이야기에 감동하며 많이 배우고, 삶의 폭을 넓힌다. 그럴싸한 미사여구로 버무려서는 만들 수 없는 삶의 진심과 본질들이 내 마음에 콕 박힌다. 


(내가 여러 작가님들의 글에 등장해서 쓴 댓글에 혹시 오글거리신 분들이 있더라도 이 자리를 빌어 분명히 말씀드리건데 내 유일한 장점 중 하나가 거짓말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 진심이다.)



그래서 나는 '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내가 만든' 이야기를 쓰고 싶다.

읽어주시는 분들께 아직은 많이 부족할 수도 있지만, 더 고민하고, 더 끌어올리며, 나를 더 몰아치겠다. 

그래서 빼꼼 세상에 내놓으려 한다.


그 안에서 나는, 모험을 떠날 것이다.

팜므파탈이 되어 수 없이 많은 남자를 후릴 것이며,

치열하게 싸우는 전사가 되어 적의 피를 뿌릴 것이다.

음모와 술수가 난무하는 정치판에서 두뇌 싸움을 할 것이고,

뒷골목 한 귀퉁이에서 더 없이 찌질 하고 찌질해 질 것이다.



요즘 정유정, 지승호 작가가 쓴 정유정 작가의 인터뷰집 <<정유정, 이야기를 이야기하다.>>를 읽고 있다.

마음에 닿는 구절이 있어, 슬쩍 옮겨본다.


<<28>>을 출간한 후, 가장 많이 들어던 질문이 있다. 하나는 앞을 못 보는 고아 소녀 승아를 꼭 그렇게 잔인하게 죽도록 만들어야 했는가. 또 하나는 착하디 착한 간호사 노수진이 동네 건달들에게 윤간을 당하고 죽어야 했는가, 이다.

거기에 대한 내 대답은 이렇다. 전쟁이나 재앙이 일어나면 가장 많이 희생당하는 이가 어린애와 여자자.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생명 그 자체로도, 가장 약탈당하기 쉬운 대상이다. 그들이 천사처럼 착하다 해서, 백합처럼 순수하다 해서 약탈 대상에서 배제될 순 없다. 우리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알면서 ‘무사히 오래오래 살았다.’ 라고 쓸 수는 없는 거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실이 아니니까. 최소한 나는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믿으니까.



난데없는 이 글이 나의 진실을 찾아가는 여정의 첫 걸음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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