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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jak Dec 15. 2019

애매해서 외로웠던 아이

는 늘 애매했다. 




내가 국민학교(응, 초등 아니고 국민이다. 나 늙었다.)에 다니던 시절의 조그만 교실은 나름의 계급으로 나뉘어 있었다. 공부 잘하는 부잣집 아이, 공부는 못해도 부잣집 아이, 가난하지만 공부는 잘하는 아이, 가난하고 공부도 못하는 아이. 대충 이 정도의 계급이 존재했으며 계급에 따른 노골적인 차별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그 시절 겨울의 난방시설은 교실 가운데에 청테이프로 네모칸을 두르고 그 안에 설치한 난로가 전부였으며 그 난로의 온기는 겨우 그 주변 얼마 쯤을 데우는 것이 끝이었다. 한 반의 학생은 대략 40여명이었고, 그 아이들은 4개의 분단으로 나눠 앉았다. 운동장을 향한 창쪽부터 1분단, 2분단, 3분단, 4분단. 난로는 2분단과 3분단 사이에 놓여 있었다.


짐작하겠지만 자리는 계급 순이었다. 월말마다 치러지는 월말고사 성적을 기준으로 1등부터 12등까지가 2분단, 그 다음이 3분단, 그 다음은 1분단, 마지막으로 햇빛도 들지 않는 복도 쪽 벽, 4분단이었다. 

겨우 10살 남짓한 국민 학생의 학업성적이라고 해 봐야 부모의 재력이나 학벌의 영향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니 2분단은 공부 잘하고 부잣집 아이의 차지인 것은 당연했다. 그 사이에 가난하지만 공부는 잘하는 아이들이 더러 끼어있었지만 오히려 그 아이들은 노골적인 차별의 적당한 방패막이 역할로 제 몫을 다했다. 그리고 간혹 동점자도 나왔다. 만약 가난한 집 아이와 부잣집아이, 이 둘의 시험 점수가 동점일 경우 2분단 마지막 자리는 누가 차지하는가? 


나는 늘 2분단에 앉았다. 공부는 잘하지만 가난한 아이의 포지션이었다. 이 지역 특유의 사투리 억양을 쓸 일이 없을 정도로 말이 없고 소심했던 나는 친구도 많지 않았으며 그나마 몇 안 되는 친구들은 거의 공부도 못하고 가난한 아이들이었다. 분단은 정해졌으되 짝을 정하는 것은 아이들 자율에 맡겼기에 저마다 친한 친구와 짝을 지어 앉았고 내 곁은 항상 절친이 시험을 망쳐 3분단으로 밀려난 아이가 채웠다.

지금은 성별 구별 없이 짝을 지어 앉는 것 같지만(정확히는 모르겠다.)당시는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앉는 것이 나름의 불문율이었다. 그동안은 시험성적 조차 성비가 잘 맞았는지 내 옆에 남자 아이가 앉는 일은 없었다. 

(아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불문율이고 나발이고 그 시절에도 ‘썸’ 타는 아이들은 있었다.)


겨울로 넘어가던 그 무렵 늘 3분단이나 1분단에 앉았던 내 친구가 처음으로 시험을 제법 잘 봤다. 이번에는 나도 친구와 함께 앉을 수 있겠지 싶었는데, 하필 동점자가 나왔다. 동점자는 우리학교 전체를 통틀어 딱 두 명이었던 의사의 자식 중 하나, 의사 아들 양모군. 

자리에 앉는 것도 성적순이라 1등이 제일 먼저 자리를 골라 앉는다. 그리고 2등, 3등의 순서.

그 와중에 집은 매우 가난했으나 타고난 머리는 좋으셨던 국민 학생 <최작>은 늘 5등 이내였으므로 일찌감치 자리를 잡았다. 당연히 눈에 띄지 않는 맨 뒷자리로. 그리고 늘 그러하듯 내 옆 자리가 비었다. 단 1초의 주저함도 없는 선생님의 단호한 판결에 따라 내 옆자리에는 의사 아들 양모군이 앉았다. 


나에게 그 겨울의 2분단은 외롭기 짝이 없는 상류사회였다.




어딜 가나 아무도 못 말리는 말썽쟁이가 있다. 쌈박질은 일상이며, 어른 못지않은 찰진 욕을 장착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아이. 온 학교에 소문이 날 대로 난 아이는 쉬는 시간마다 길쭉한 복도를 뛰어다니며 다른 아이들을 괴롭혔다. 주먹질은 물론, 여자아이들의 치맛자락  들추기, 뛰어가는 아이 발 걸어 넘어트리기 등 종류불문 못된 짓은 골라서 하고 다녔다.


이 아이가 내 뺨을 때렸다. 이유는 없었고, 그냥 때렸다. 영문도 모르고 따귀를 맞은 나는 어안이 벙벙한데 그 때  수업 종이 울렸고, 아이는 쪼르르 자신의 반으로 들어가 버렸다. 


텅 빈 복도에 혼자 남겨진 나는 교실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 아이의 반 문 앞에 오똑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반의 담임이 나를 혼내며 교실로 돌아가라고 했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눈물을 똑똑 떨어트리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얼마 후, 내가 들어오지 않자 우리 반 아이가 나를 찾으러 나왔지만 그 때도 나는 들어가지 않았다. 결국 우리 반 담임이 나와 이유를 물었고, 나는 울면서 이유를 설명했다. 담임은 그 반으로 들어가 양해를 구하고 그 아이를 데리고 나왔다. 담임은 그 아이에게 사과하라고 했지만 아이는 빙글빙글 웃으며 ‘미안’ 이라고 할 뿐이었다. 사과 받겠냐는 담임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담임이 그럼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고 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 아이의 뺨을 후려쳤다.

갑작스럽게 따귀를 후려 맞은 아이는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 이를 꽉 악물었다. 아픔과 쪽팔림이다.

설마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던지 담임도 놀라고 복도로 구경나온 아이들도 모두 놀랐다. 뒤늦게 뛰어나온 그 반 담임도 놀랐다.


이후 학년 전체에 내 소문이 퍼졌고, 한동안 아이들은 나를 보면 따귀 때리는 시늉을 했다. 그런데 우습게도 이 ‘또라이’ 같은 사건이 가능했던 것은 내가 제법 공부를 잘하는 아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우리 반 담임이 그나마 ‘내 새끼 때린 놈 누구냐.’ 라는 심정으로 응한 것이다. 


사실 나는 많이 외롭고 무서웠다.

텅 빈 복도에서 눈물을 떨구며 혼자 서 있었을 때, 난데없이 맞은 뺨은 벌겋게 부어올랐고 그 만큼의 부끄러움과 공포가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럼에도 나는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맞을 짓을 한 적이 없는데 맞아야 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어디서 그런 '또라이力' 이 나왔는지 알 길이 없지만 물러설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극소심' 과 '또라이'를 오가던 애매한 나는, 늘 외로운 아이였다. 



그 아이는 자라서, 자라다 못해 늙어가면서도 여전히 애매해서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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