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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jak Mar 03. 2020

내어 보일 수 있는, 딱 그만큼의 솔직함.

    

‘글을 쓴다는 것은 실오라기 한 올 없이 알몸으로 명동 거리를 걸어가는 것이다.’  

   

처음 글을 쓸 때 주워들었던 ‘솔직함’에 대한 이야기였다.


모름지기 작가라는 것은, 글을 쓰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솔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때로는 지나친 강박이 되기도 했으며, 어디까지 까라는 것인가 혼란스럽기도 했다.


오랜 시간 그 언저리를 맴돌며 내가 내린 결론은 ‘다 꺼낼 필요는 없다. 그저 내 보일 수 있는 것에 스스로 솔직하기만 하면 된다. 거짓말이 하고 싶어지거든 그건 꺼내지 말라.’ 였다.     

나의 모든 것을 모두에게 다 내보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니 내 보일 수 있는 만큼, 그 안에서 솔직하자는 것이었다. 나에 대한 이야기이든. 지어낸 이야기이든.     




지난 해 12월, 아버지는 척추가 부러졌다. 그냥 허리를 굽히다가 부러졌다.

병원에서는 골다공증이 심한 상태라 작은 충격에도 부서지기 쉬운 뼈 상태였으니, 기침하다가 부서지는 일도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했다. 

문제는 치료였는데, 오랜 지병으로 복용하는 약도 많은 상태였고, 이런저런 장기들이 조금씩은 다 제 기능을 못하고 있으니 수술은 위험부담이 너무 컸고, 흔히 시행하는 골 시멘트 시술도 효과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그저 움직이지 않고 진통제 정도를 복용하는 일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이라고 한 모양이다.     


2주 정도 입원을 했고, 퇴원을 했지만 아버지의 뼈는 붙지 않았다.

그리고 온몸이 붓고, 숨이 가쁜 증상으로 다른 병원에 또 2주 입원을 했다.     


또한 그 와중에도 입원과는 별개로 정기적으로 진료를 받는 대학병원 진료를 위해 집에서 1시간 거리의 대학병원을 나녀 와야 했다.      


그렇게 아버지의 겨울이 지나고 있었다.

덩달아 당신도 이약 저약 달고 사는 엄마 역시 아버지의 병치레의 영향권 안에서 지친 겨울을 지나고 있었다.     



3월의 첫 월요일. 


아버지의 대학병원 진료일이었다. 지난겨울 이래 세 번째 동행이다.     

원래 아버지 혼자 다니던 것을 허리를 다친 다음부터는 아버지가 운전을 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내가 따라붙었고, 부녀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을 잘 아는 엄마가 둘만 보내면 싸움날까봐 또 어쩔 수 없이 따라붙었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대학병원은 전에 없이 깐깐했다.

곳곳의 출입구는 모두 막혔고, 오직 한 곳만 개방되었으며 3중 4중의 관문을 거쳐야 병원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입구에 부모님을 내려놓고 주차를 하고 들어와 보니 이미 안으로 들어가 있어야 할 부모님이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은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잡혀'있었다.     


아버지가 열이 있단다.


이 상황에서는 담당 진료과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는 방침에 따라 오도 가도 못 한 채 기다려야 했다. 

엄마는 혼자서 애가 타서 애먼 직원에게 ‘집밖에도 안 나갔다며’ 묻지도 않은 변호를 늘어놓았고, 정작 아버지는 멀뚱멀뚱 먼 산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 옆에서 함께 기다리다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아버지가 선별진료소로 이동했다고.     


병원 안에만 있을 줄 알고 두꺼운 패딩을 차에 벗어두고 왔는데, 조금 떨어진 선별진료소까지 걸어갈 생각을 하니 추웠다. 지금 당장 내가 달려간대도 뭐 딱히 할 건 없을테니 우선 옷부터 갈아입자 싶어서 옷을 갈아입고 뒤따라 선별진료소로 향하는데, 저만치서 직원이 밀어주는 휠체어에 탄 키 크고 깡마른 노인 하나랑 그 뒤를 따르는 자그마한 체구의 노인이 보인다. 허리 때문에 휠체어를 빌려 탄 모양이다.      

선별진료소에서 재차 열을 쟀지만, 정상이었다고 한다. 병원 입구에서 측정했을 때, 두 번 다 정상범주를 벗어났던 열이 불과 10분도 안 되는 사이에 훅 내려간 것이다.     


다행이다.      


쫓겨났던(?) 병원에 다시 되돌아온 아버지는 그 넓은 종합병원의 구석구석, 1층에서 x-ray를 찍고, 2층에서 채혈을 하고, 3층에서 진료를 보는 그 순서를 정확하게 알고, 막힘없이 움직였다. 10년 가까운 세월 혼자 다닌 내공이다. 


그러나 늙은 아버지의 동작은 느렸고, 말귀는 잘 못 알아들어 직원이 목소리를 높여야 했고, 가까운 길을 두고도 자신이 아는 길로만 가느라 시간은 몇 배가 걸렸다.     

허리를 다치지 않았더라면 계속 혼자 다녔을 길, 오늘 같은 날에 혼자서 선별진료소까지 끌려(?)갔다 되돌아 왔을 것을 생각하니, 어쨌을까 싶다.     


저 노인네, 외로웠겠구나. 

우습게도 허리를 다친 덕에 마누라, 자식까지 대동하고 유세떨듯 병원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밥을 먹자던 아버지는 메뉴는 말을 안 하고 저건 싫고, 이건 싫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어차피 1시간 거리니 그냥 집으로 가자고, 가서 먹든 먹고 싶은 걸 시켜 먹든 그냥 가자고 하며 빠른 속도로 차를 몰았다. 심통이 난 모양이다. 어린애처럼 투덜거리기 시작한다. 듣고 있던 엄마가 한 소리 면박을 준다. 그렇게 두 노인이 투닥거린다.     


그만 왈칵, 울어버렸다. 감출 수도, 그럴 필요도 없어서 줄줄 흐르는 눈물 그대로 두 노인 앞에서 울어버렸다.     



병원입구에서 열이 난 것이 아버지가 아니라 엄마였다면 나는 자리를 비우지 않았을 것이고, 혹 자리를 비웠더라도 얇은 옷이 춥다고 차에서 굳이 옷을 갈아입느라 시간을 흘려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당장 선별진료소로 숨이 차도록 달려갔을 것이다. 아버지 곁에는 엄마가 있다는 믿음과 함께 아버지와 나 사이의 거리감이 그만큼이었다.     


그럼에도 또 한편 문득 짠하고, 딱한 세월을 살아낸 당신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당신의 투정이 참으로 미웠다.

복잡하고, 묘한 감정이 뒤섞여 그간 억지로 잡고 있던 끈을 놓아버렸다.

 

사실 나는 아침부터 아팠고, 아버지가 진료를 기다리는 동안에 남의 눈 의식할 염치도 없이 패딩을 뒤집어쓰고 대기실 의자에 길게 누워 자버렸으며, 돌아오는 동안에도 내내 누워 잘 생각밖에 없었다. 문득 얼굴 감각이 둔해지고, 손이 저렸고, 잠잠하다가 갑자기 밀고 들어오는 손목 통증 때문에 온 몸이 한껏 긴장상태였다.     


두 노인보다는 나았을 뿐 나도 그리 멀쩡하지는 않았다.     


편히 여생을 보냈으면 좋았을 것을 약봉지, 걱정 보따리를 끌어 안고 사는 두 노인들이나,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어려운 주제에 나불나불 입만 살아서 괜찮은 척 하고 있는 나나, 그 셋이 함께 타고 있는 오래 된 차의 털털거리는 떨림이 참고 있던 눈물 둑을 허물어 버렸다.     



그럼에도 창밖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마냥 따뜻해서, 미련하게 또 봄날을 기다리는 마음이 나는 참 징글징글하다. 허망한 기다림 따위 접어두고 그만 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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