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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jak Mar 18. 2020

너 따위가 나를 훼손하게 두지 않겠다.

   

제법 봄이다.


아직은 때가 아닌가 싶으면서도 불쑥 아이스 라떼를 주문하고 말았다. 게다가 연유라떼다.

달달하다 못해 단맛으로 목이 메일 지경이다. 안되겠다 싶어 샷을 추가해서 쓴맛으로 단맛을 중화했다. 그러면서도 허니브레드를 추가주문했다. 나는 오늘 단맛으로 나를 죽일셈인가?     


긴 겨울이 지났음에도 세상을 덮친 전염병 탓에 움츠러들었던 마음이 이제는 조금씩 녹고 있는 것인지 카페 안에 제법 사람들이 모였다. 턱에 마스크를 걸치고 음료를 마시며 동행과 수다를 떨고, 노트북을 열어 두고 무언가에 열심이다. 문제집을 펼쳐놓고 공부 삼매경에 빠진 학생도 보인다.     


이 시국의 사회적 거리두기와는 별개로, 나는 이미 자가격리 중이었다. 마음이 망가지고, 몸이 망가졌으니 나가고 싶지도, 창문을 열고 싶지도 않았다. 하루의 대부분을 암막커튼을 치고 누워 지냈으며, 불쑥 터져 나오는 눈물로 얼굴이 젖었다.     


그럴수록 망가진 몸은 더욱 심통을 부려 통증 때문에 잠 못 이루는 시간이 길어지더니 결국 새벽녘에 지쳐 잠이 들고, 한 낮에 겨우 일어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오늘도 낮의 한가운데 토막이 되어서야 겨우 눈을 부비고 일어났다. 주섬주섬 일어나 암막커튼을 걷고 빼꼼 창문을 열어보니 햇살이 쨍하다.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샤워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나와서 가까운 카페에 앉아 넘어가는 해를 만났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연유라떼는 달디 달고, 그보다 더 달콤한 허니브레드 위에 올린 휘핑크림은 입안에서 살살 녹아내린다.      


좌절이구나. 역시 좌절의 단맛이구나.      


요대로 앉아 그냥 이 단맛에 담뿍 빠져버리면, 그냥 눈 감아 버리면 될 일 이었다. 떨치려고 힘쓰지 말고, 직면하려고 한껏 미간을 모으지 말고, 통유리 너머 쏟아지는 햇빛을 등으로 따뜻하게 받으며 달달한 좌절의 맛에 그냥 빠져 버리면 될 일이다. 단맛 위에 단맛을 쏟아부어서 속이 달다 못해 치밀어 오를지라도, 입안의 단맛만 탐닉하면 될 일이다. 입안에 씁쓸하게 번지는 쓴 맛을 기꺼이 즐기던 나를 잊어버리면 될 일이다. 고단한 쓴맛 따위 없던 것처럼.          





외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더니 나를 반긴 택배 박스가 오늘만 이만큼이다. 


한 일주일 전부터 무언가를 마구 질러댔다. 당장 화장품이 필요했다. 떨어진 것은 수분크림 뿐이었지만 어차피 곧 스킨이 떨어질 것이니 스킨도 질렀고, 이미 차고 넘치는 붉은 립스틱도 또 하나 질렀다. 이건 핑크 베이스가 아니라 오렌지 베이스의 붉은 색이니까 다른 것이다. 옛부터 하늘아래 같은 색조는 없다 했다. 봄옷도 몇 개 질렀다. 살이쪄서 사이즈가 맞지 않건 말건. 그리고 책도 좀 질렀다. 안 읽은 책이 책장 두칸을 채우고 있는 것은 알 바 아니다. 당장, 나는 새것이 필요했다. 그 밖에도 기타 등등 이것저것 <온갖 새것>들을 질렀다. 그렇게 며칠동안 이어지던 간헐적 택배 행렬이 오늘은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내가 없는 사이 내 방에 택배 상자를 쌓았을 모친의 혀 차는 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묵직한 것부터 가벼운 것까지 크기별, 종류별의 택배 상자를 바라보았다.


'뭐하러? 하루종일 암막 커튼을 치고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을 거면서 뭐하러 이렇게 질러대셨나? 허전함을, 불안함을 떨치려 ‘텅장요정’을 소환하셨나? 그러면 좀 나아? 순간의 위안이면 충분하던가?'

     

저 깊숙한 곳에서 연유라떼와 휘핑크림이 뒤섞인 트름 뒤로, 잔뜩 쓴물이 올라온다.  

쏟아부은 단맛이 나는 싫다. 


먼지 쌓인 노트북을 열고, 쓴 세상을 똑바로 바라보겠다.

못해도 1년치를 질렀으니, 이제 헛헛한 지름도 끝났다.     

그러니까 나는.


좌절과 패배감.

너 따위가 감히 나를 훼손하게 두지 않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어 보일 수 있는, 딱 그만큼의 솔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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