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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jak Apr 02. 2020

그래서 어쩌라고?

이십 대 자락의 나는 별 볼 일 없는 청춘이었다. 스펙도 별것 없었고 가진 것도 없었다. 

(사실은 지금도 그렇다. 그때는 젊기라도 했지. 아, 잠깐..울고 가자.)

그냥 글을 좋아했고, 글을 쓰고 싶었고, 글을 써서 먹고살기를 바랐다.

그 마음을 품고 어느 늦가을, 모 교육기관을 찾았다. 

그곳에서 만난 나의 첫 선생님은 60대 할아버지였다. 적잖이 실망했다. 솔직히 시대에 뒤떨어진 뒷방 늙은이의 용돈 벌이에 내가 일조하고 있다는 마음도 들었다.


글쓰기 수업이라는 것이 대동소이해서 주된 내용은 <합평>이었다. 수업에 나오는 지망생들은 경쟁적으로 글을 써냈고 합평시간에는 시퍼런 칼날들이 날아다녔다. 수업에 나오는 스무명 남짓한 수강생 사이에 간혹 한 둘 쯤 내공이 깊은 고수도 섞여 있었지만 태반이 이제 막 발을 뗀 얼치기였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말이 좋아 비평이고 비판이지 그를 빙자해 어떻게든 타인의 글에서 헛점을 찾아내 '비난'하려 달려드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합평시간 마다 수강생들은 단어 하나를 꼬투리 잡고 늘어지거나 '빨간펜 국어 선생님'에 빙의해서 맞춤법을 지적하고, 조금 깊이 들어갔다 치면 설정의 모순을 발견하고 한껏 지적질 한다. 심지어 ‘나라면 이렇게 했겠다’면서 원작자를 앞에 두고 본인이 그의 스토리를 재구성해 10여 분간 늘어놓는 경우도 생겼다. 그들 중 가끔 내공이 있어 뵈는 이들은 보통 이런 식으로 말했다. ‘좋네요. 다음이 기대되요.’ 사실 이건 칭찬이라기 보다는 ‘끕’ 안되는 이들을 두고 설왕설래 하기 싫다는 뜻이다.      


읽는 이만 그랬는가? 쓴 이는 자신의 글에 대한 비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형식적으로 붙이는 영혼없는 '감사합니다.' 뒤에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구구절절 자신의 글을 설명 하면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감추려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수업 뒷풀이를 빙자한 술자리에서는 고성이 오가고, 머리채를 잡고 싸운 사람들도 있었다.         

어느 세계나 경쟁의 세계는 아름답지 않다. 글을 쓴다고 해서 대단히 고고할리 없다. 세상의 모든 경쟁은 치열한 아귀다툼이다. 그 세계 안에서 '작가' 가 되겠다고 제 발로 거기까지 찾아온 이들이다. 모두들 어디서 글 좀 쓴다는 소리 듣고 살던 사람들이고 조금만 지나면 '대단한' 작가가 될 것이라는 최면 같은 것에 걸려있는 시기 아니겠는가. 이 불안정한 길에 들어서면서 타인보다 내가 낫다는 근거없는 자신감과 확신이 필요했을 것이고 솔직히 다들 내 눈엔 내 글이 제일 잘나 보였을 것이다. 혹은 '나보다 잘남'이 보일 때는 인정보다는 질투가 먼저 올라오기도 했을 것이다. 사실 뭘 몰라서 생긴 일이다. 제대로 읽을 줄도, 제대로 쓸 줄도 모르는 초보들이 모여 만들어낸 오합지졸이었다. 거리의 운전자들도 초보딱지 막 뗀 6개월차 쯤에 제일 겁이 없듯이. 



그 때 나는 어땠나? 

뭘 몰랐으니 겁이 없었고, 그 때의 글벗들에 비해 확연히 어려서 간절함의 농도가 옅었으며, 아직 좌절의 맛도 제대로 모를 때라 한 없이 건방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제법’ 잘 쓴다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거만한 기대와는 달리 내 글은 수업시간 마다 열리는 서슬퍼런 말의 전쟁터에서 십자포화를 맞고 너덜거릴 뿐이었다. 그리고 나 또한 그에 맞서 내 글에 대한 ‘설명’과 ‘변호’를 온 힘을 다해 해 댔으며 그러면서 내 진가를 모르는 그들을 마음속으로 마음껏 비웃었다. 흥!     


매주 그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우리 반의 노(老) 선생님은 두툼한 안경 너머로 그저 허허 웃으며 병아리들의 전쟁을 감상하셨다. 그리고 마지막에 본인의 의견을 전하시며 ‘건투’ 아니 ‘건필’을 비셨다.     


그날도 전쟁이었다. 

나는 날아오는 칼날에 맞서 안간힘을 쓰며 맞불을 놓았다. 한바탕 전쟁이 끝나고 선생님의 평가만 남았다.     

선생님은 내내 칭찬을 이어가셨다. 문장도 좋고, 발상도 재기발랄하고, 나름 소재도 좋다.  

나는 으쓱했다. 마음 속으로 나에게 칼을 던진 다른 수강생들을 향해 ‘거봐, 이것들아. 니들이 어디서 감히 나에게 칼을 던져?’ 하고 한껏 어깨뽕을 세웠다. 거만함이 하늘을 찌르고 올라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선생님의 마지막 말에 내 어깨뽕은 바람이 폭 빠져버렸고 그대로 땅으로 추락해 버렸다.     


"그런데! 그래서 어쩌라고? 어쩌라고, 이년아!"




나이를 먹어 가며, 세월을 살아 내며 세상에 이해 못 할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라는 질문은 무의미해졌다. 각자의 입장에서는 모두가 그럴 수 있다.

문제는 이해가 아니라 마음 안에서 우러나는 ‘진짜’ 감정이었다. 

안다고 해서, 이해한다고 해서 끝이 아니었다.      


나는 이제 정신 나간 살인자조차 이해할 수 있지만 내가 봐야 할 것은 정신 나간 살인자가 늘어놓은 그럴싸한 가정사의 향연에 그럴 수 있지 하고 이해하고 넘기는 것이 아니라 그의 손에 목숨을 잃은 이의 아픔에 내 가슴이 저려오는 일이 먼저였다.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이었는지를 제대로 보는 것이었다. 내가 할 일은 매력적인 살인자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자리 잡은 진실을 제대로 그려내는 일이었다. 내 글을 본 이들이 내가 만든 매력적인 살인자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그의 매력을 주렁주렁 '설명' 하려 할 것이 아니라, 그의 손에 목숨을 잃은 이의 아픔과의 균형을 놓지 말아야 하는 것이었다. 어둠을 그린다고 빛을 잃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까. 


오래전 내 글에 빠져있던 ‘어쩌라고’를 찾아가는 과정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곁다리에서 반짝이는 얄팍한 재능-있기나 한 건지 알 수 없는 그 재능- 따위 보다 우직하게 바탕을 지키는 튼튼한 두 다리와 세상을 바라보는 가슴의 진심을 찾았어야 하는 일이었다. 내가 만드는 글도 그렇고, 싱거운 내 브런치의 글들도 그렇고 뭔가 많이 비어 보이는 것은 '어쩌라고'를 다 못 찾은 탓이다. 


이렇게 한참 후에 그 날을 떠올리며 답을 찾아갈 것을 알았던 것 처럼 오래 전 노 선생님은 ‘어쩌라고 이년아.’를 내게 던지셨다.  (이년아 저년아에 기분 상하지는 않았다. 단편적인 단어에 집착하기 보다는 그에 담긴 감정이 더 중요한 것을 그때도 희미하게나마 알고는 있었으니.)

      


우리의 전쟁을 마냥 관망하는 듯 보였던 노 선생님은 사실 깊은 내공을 담아 수강생들 모두에게 한 줄 한 줄 핵심을 짚는 평가를 자필로 남겨주셨었다. 그걸 알아채기에는 우리가, 아니 내가 많이 모자랐지만. 

많은 습작 뭉치를 버렸지만 초기 몇 개는 기념으로 남겨뒀었는데, 그곳에 선생님의 글귀가 남아있다.

               




아침에 일어난 지 일주일 정도 되었다. 습관처럼 이어지던 ‘야밤 생활’을 청산한 것은 건강 상의 문제가 컸고 세상의 잣대에 나를 맞추지 않는 것과 게으름을 구별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비록 독고다이(獨.go. die. 인생사, 혼자 가다가 죽는것.)의 마음가짐으로 살고 있으되 세상의 시간을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다름이 아니라 게으름으로 드러난 생활패턴의 다름을 글쟁이의 특별함으로 분칠하면서 자위할 필요는 없었다. 


요즘 나는 두 눈으로 뜨는 해를 보고, 허리 컨디션이 견딜만 한 날은 해질녘 호수를 산책하고, 잠들기 전에 책을 읽고, '불안 섞인 불면' 대신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눈꺼풀에게 기꺼이 져 주면서 잠자리에 든다.     


그리고 ‘쓰기’ 시작했다.     


음...그래서 어쩌라고? 

아직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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