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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jak Apr 04. 2020

앙큼하게 아플 것을.

9살 때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환자복 대신 핑크색 잠옷을 입고 다녔다. 병원에 맞는 환자복이 없어서 그랬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워낙 오래전 일이라 정말 환자복이 없었는지 여부는 잘 모르겠다. 그저 나는 환자복 대신 핑크색 잠옷을 입었다는 기억이 있을 뿐이다. 섬유는 면혼방이었을까? 보들보들한 소재에 바지는 착착 몸에 감겼고, 소맷단, 허리춤, 바짓단에 같은 소재의 레이스가 있었다. 어린 눈에 썩 예쁜 잠옷이라서 꽤나 마음에 들었던 기억이 있다.

(어쩌면 환자복을 안 입겠다고 버텨서 그걸 입었을지도 모른다는 합리적 의심이 든다.)


당시의 나는 깡마르고 하얀 아이였다. 게다가 폐렴이면 폐병이다. 콜록콜록 기침을 달고 살았다.

그런 아이가 핑크색 잠옷 차림으로 병원을 돌아다니면 만나는 어른마다 ‘아이고, 조그만 애기가 어디가 아파서...’ 하면서 안타까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곤 했었다. 

9살이면 애기 소리 들을 나이는 아니었지만 나는 약해 보이고, 아파보이는 게 좋았던 것 같다. 

자못 힘없는 표정과 금세 쓰러질 듯한 몸짓으로 ‘여리여리’ 연기를 했던 것 같다.   

  

앙큼한 것.     




아픈 척은 거기까지였다. 뭣도 할 줄 모르는 채로 어느새 어른이 되어 세상을 살아내다보니 아플 일이 훨씬 많았다. 콜록콜록 기침을 달고 살지 않아도 뼛속 뻐근한 삶이 수시로 몰려들었다. 

그때마다 아픈 척은 커녕 아프지 않은 척 하기 바빴다.


그러는 사이 마음에는 굳은살이 배겼고, 몸에는 지독한 흔적이 남았다.     

견디는 줄 알고 보냈던 시간들은 결국은 나를 갉아먹는 시간이었다.


아프면 아프다고 떠들고 다닐 것을 그랬다. 

핑크색 잠옷 입은 앙큼한 아이 그대로 아픈 척을 하면서 새초롬하게 살 것을 그랬다.     

이래저래 진짜 아파서 체면이고 나발이고 엉엉 울다 보니 괜히 약이 오른다.


앙큼하게 아플 걸 그랬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의 호숫가에는 봄꽃이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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