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oijak Sep 09. 2020

나 답지 않음을 응원합니다.

“너 답지 않게 왜 이래?”

“도대체 나다운 게 뭔데?”     


첫 등장은 신선했겠지만 이후 너무 흔하게 등장하던 탓인지 언제부턴가 속된 말로 손발이 오그라드는 대사의 대명사가 된 문장이다. 실제로 글쓰기 공부를 하던 시절, 합평 시간에 저 대사가 나오면 모두가 키득거리기 바빴고 ‘올드해요.’ ‘식상해요.’ 라는 평가가 내려졌다.

대부분 심각하고 엄중한 상황, 인물의 격렬한 감정을 표현하는 상황에 따라오는 대사인데 읽는 이들의 머릿속의 필터를 거쳐 개그로 전락하는 불명예를 안기기도 했다. 본질을 외면당한 글쓴이의 부글부글 끓는 심정, 터지는 속은 덤이다.        


그런데, 정작 질문에 답을 해보니 말문이 막힌다.

다시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까 나 다운게 뭔데요?”       




작업실을 마련한 지 두어 달이 지났다. 그 사이에 계획했던 일 중 하나가 거하게 틀어졌고, 이후에는 처음의 결심과 달리 슬슬 출근(?)시간이 늦어지고, 퇴근 시간도 덩달아 늦어졌다. 그러다 보니 아침잠이 늘었고, 또 기상 시간이 늦춰지고 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 내가 좀 늦게 일어난다고 해서 그 자체로 죄책감을 느낄 이유도 없었다. 다만, 문제의 본질은 슬그머니 잠식하는 게으름이었다. 슬그머니 몸으로 스며든 게으름. 그게 ‘나다움’이었다.     


물론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내가 진심 게으른 사람인지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일단 눈앞에 어질러진 것이 싫어서 쓴 물건을 늘 제자리에 두고, 먹고 마신 것을 쌓아두지 않는다. 쓰레기가 쌓인 냄새가 싫어서 배달 음식 그릇까지 세제로 설거지를 해서 가능한 빨리 버린다. 수시로 물티슈를 들고 돌아다니며 먼지와 얼룩을 닦아낸다. 집에서 나올 때, 방안의 물건은 전부 제자리를 잡아 두고, 침구를 정리한 뒤에 나선다. 물론, 아침 출근 시간에 쫒기지 않으니 가능한 일이지만 나는 평소에도 너저분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뒹구는 생수병과 맥주캔 사이에서 잠드는 일 같은 것은 내 성정상 불가능한 일이다. 뭔가를 정리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어떤 잣대로 보면 나는 게으르지 않은 인간이다.   

        

그러나 이것은 본질을 외면한 부지런함이다. 해야할 것들을 두고 '부지런히' 딴짓하는 중이다.        


글이 문제다. 항상 모든 것의 끝은 글이다. (어찌됐든 글쟁이잖은가.)다시 봐도 내 글이 문제다.

굉장히 빠른 속도로 글을 쓰고, 글을 끝내고,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무엇을 놓치지 않는 편이다.

이 공간의 글을 비롯해 세상에 내놓은 내 글들은 대부분 빠른시간 안에 써낸 글이다. 축복받은 재능일 수도 있다. 그런데 때로는 그 얄팍한 재능을 믿고 버티다가 기회를 날려버린 경우가 태반이다.      


왜 그 '모냥' 일까?

나는 오랜 시간 고민하고, 최선의 문장, 단어를 선택하는 일, 더 나은 상황을 가정하는 일, 더더욱 효과적인 장면을 고민하는 일에 취약하다. 한 마디로 ‘내공’이 없다. 순간적인 감각, 오르는 생각을 잡아내 글로 옮기는 것에는 익숙하지만 오랜 시간 뜸을 들이고, 더 나은 방향을 고민하는 것에는 서툴기 짝이 없다. 진득하게 견디지 못해 빠른 속도로 해치우고, 지레 지쳐 문을 닫고 돌아보지 않는 것이다. 나는 한번 읽은 책도, 이미 끝낸 내 글도 다시 안 읽는 편이다.      


빠른시간 안에 떠오르는 감각을 잡아채는 것, 오랜 시간 고민하고 뜸을 들이는 것, 모두 일장일단이 있으니 어느 것이 정답이라고 할 수 없다. 뜨거운 순간에 오롯이 집중하는 것, 오랜 시간 품고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 그 모두 사랑이라 할 수 있는 것처럼. 

다만 요즈음의 내 글과, 글을 쓰는 나에게서 내공 부족의 취약함이 드러나고 있다. 이 부분을 제대로 해결하지 않는다면 나는 끝내 주저앉을 것이라는 불안함이 빼꼼 고개를 든다.

그런데 그 상황을 마주하고 개선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게으른 사람이라는 ‘나다움’을 벗지 못했다. 몰라서 그러겠는가, 두려우니 무서우니 그렇겠지.  죽도록 애썼는데도 안되면 그냥 끝 아닌가.


그 불안과 두려움에 한 자락 더 불을 지피는 것은 건강이다. 허리, 팔목, 뱃속 할 것 없이 아우성이다. 그럼에도 운동은 여전히 먼 나라 이야기이고, 하루종일 들이붓는 커피는 줄이기가 쉽지 않다. 나는 원래 움직이는 것 싫어하고, 커피를 좋아하고, 맵고 짠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그렇다. 이 역시 ‘나다움’이다.    




나는 초지일관 변함없는 사람이었을까? 아니다. 나는 끊임없이 변했다. 지독하게 고집스러운 듯 버티다가도 난데없이 전혀 다른 길로 겁 없이 방향을 틀곤 했었다. 어제와 오늘의 말이 다름에 머쓱해지는 것보다 성장하는 나를 보는 뿌듯함이 더 좋았다. 상처를 끌어안고 우는 날이 많았지만, 그 상처조차 피식 웃으며 쓰다듬는 순간도 많았다. 일관성 없는 것이 지독한 일관성이었다.        

  

여전히 씁쓸한 커피가 훨씬 익숙하지만 하루에 한 잔 정도는 커피 대신 자극 없는 차를 찾아 마신다. 맵고 짠 음식대신 슴슴한 음식으로 한 끼 정도는 해결하려고 하고, 특히 운동은 정이 안 붙지만 수시로 기지개라도 펴고, 라텍스 밴드를 걸고 손목을 꺾는다. 그런데도 아파 죽을 것 같은 날에는 슬쩍 외롭고, 서럽기도 하지만 찬찬히 돌아보면 걸음조차 못 떼던 때 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슬슬 태풍이 지나간 호수를 다시 찾을 참이다. 그리고 pc모니터 안에서 껌벅이는 커서를 마주하더라도 조바심 내지 않고 지켜볼 것이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냐고.        



            

거창한 계획을 하지 않고, 매 순간 닥치는 일을 하는 것, 그것은 변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두려움을 외면한 게으름이 아닌 진짜 나의 본질이 된다면 ‘나다움’이라 말하겠다. 나는 그런 사람이라고. 슬금슬금 느린 속도로 눈앞의 두려움을 찢는다고.     


일관성 없는 일관성, 나의 ‘나답지 않은 나다움’을 응원하겠다.          

나라도 나를 '애껴야' 하니까.그리고 결국, 살아내는 것은 나의 몫이다.



이 글을 옛 시절 선생님이나 친구들이 읽는다면 ‘너 아직도 그러고 있냐?’ 하고 웃을지도 모르겠다. 음, 그래서 아무리 가르쳐 줘도 지가 알아서 깨닫지 못하면 명백한 진리도 개똥인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적당히 눈을 감아도 될일인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