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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jak Sep 11. 2020

너, 상고 가서 책상 닦을 거니?

나는 실패한 적이 없는 사람.

중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공부하기 싫어하는 아이들에게 항상 같은 말을 했었다.


- 너, 상고 가서 책상 닦을 거니?


일종의 <관용구>처럼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았고 '공고' 라던가 '중졸' 이라든가 '바닥' 이라든가 등등의  변주나 응용도 없었다. 선생님은 부임 2년 차의 국어 선생님이었는데 주말이면 아이들을 이끌고 소풍을 다니고, 집으로 불러 쫄면을 해 먹고 놀고, 진지하게 아이들을 이끌어 주고 싶은 어른이자 그 아이들 때문에 울고 고민하던 여린 감성을 품은 20대의 젊은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의 수업은 재미있었고, 연구나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좋은 선생님이었다. 그리고 공부를 못한다고 차별하는 선생님도 아니었다.    

 

다만 교원대학교 출신, 어려서부터 평생을 성실한 모범생으로 살아온 이십대 중반 선생님의 경험치로는 공부를 못하는 것은 곧 상고를 가는 것이고, 상고를 가면 그냥 남의 책상을 닦는, 본인 기준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이 된다는 단편적 관념에서 벗어나질 못한 것이었다. 그래서 ‘너 상고 가서 책상닦을 거니?’는 뻔한 표현을 빌자면 선생님 나름 ‘더 열심히 하라는 채찍질’이었다.     


나도 시험에서 성적이 떨어질 때, 혹은 수업 중에 딴짓하다 걸렸을 때, 적당히 ‘가벼운’ 사고를 쳤을 때 선생님에게서 ‘상고가서 책상’으로 꾸중을 들었다. 그런데 선생님도 나도 끝내 피식 웃고 말았다. 나의 성적이 ‘상고 가서 책상 닦을’ 성적은 아니었던 이유였다.     


그리고 2년 후, 나는 **상업 고등학교 학생이 되었다.




1년 사이에 드라마틱하게 성적이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당시 600명쯤 다니던 중학교에서 3년 내내 100등 안쪽의 성적을 유지했으니 우수한 성적은 아니어도 항상 무난한 성적이었다. 비평준화 지역이었고 성적에 따라 줄을 세워 안정적으로 고등학교 원서를 써줬기 때문에 입학시험은 요식행위일 뿐 이미 당락은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라 인문계 여고에 원서를 내기만 하면 그냥 붙는 안정권이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이었지만 사실 우리집이 넉넉하진 않았어도 작으나마 가족이 살 집이 있었고 아버지는 직장이 있었고, 빚도 없었다. 속사정을 다 알 길은 없으나 적어도 내가 스무살에 가장이 되어 집안 식구를 벌어먹여야 할 상황은 아니었다. 나는 그냥 공부가 하기 싫었고, 하루하루 먹고 살기 바쁜 처지에 몸이 불편한 둘째 아이를 건사하기도 힘들었던 차에 큰 딸이 돈을 벌겠다면 굳이 강하게 말릴 의지가 없었던 부모님과 나 하나 없어지면 커트 라인에 걸린 부잣집 딸에게 여고 원서를 써 줄 수 있었던 중3 담임의 눈치. 이 세박자가 만나서 나의 '상고'행은 별 갈등없이 결정되었다. 앞날에 대한 다양한 가능성과 그로 인해 선택할 수 있는 상황들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엔 어리고 서툴렀으면서도 지레 어른흉내 내는 사춘기 소녀의 촉촉한 감성과 그것을 함께 고민하고 이끌어 줄 어른의 부재가 만나 어쩌면 처음이었을 인생의 갈래길에서 너무나 싱겁게 선택지가 결정된 것이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야 나는 그 선택이 틀렸음을 알았다. 내가 공부를 싫어했지만, 단순함은 더 싫어하는 것을 몰랐다. 주산이며 부기며 이런 상업계 과목들이 큼직한 돌덩이가 되어 데굴데굴 굴러왔다.

세기말 귀모 작가의 로맨스 소설에서 전설처럼 전해지던 ‘주판 튕기는 손으로 어딜 만져!’의 주판 튕기는 손, 상고 학생의 손은 빠르고 정확해야 했는데 나는 발달이 덜 된 양 느리고 느렸다. 비평준화 지역의 서열에 따라 낮은 등급으로 판정을 받은 상업 고등학교는 선생님들 조차 학교의 아이들을 '우수하지 않은' 아이들로 재단하고 적당히 '대충~' 가는 분위기였기에 내가 좋아하는 국어나 역사 과목의 선생님들의 열정은 나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그들의 수업은 재미없었다. 선생님의 실수를 알아서 바로잡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렇게 매사 상고에 적응하지 못한 나는 태어나서 처음 받아본 성적표를 받아들고 막막했고, 이후 어찌어찌 비상업 교과목으로 성적을 만회해 딱 중간 정도로 졸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학을 갔다. 1년을 독서실을 다니며 독학했고, 지방국립대 인문대학에 합격했다. 나쁘지 않은 성과였다. 3년 내내 책상 앞에 앉아 야자까지 하면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친구들과 3년 내내 5시 이후에 하교한 적이 없는 내가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으니 따지고 보자면 인풋 대비 아웃풋은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그놈의 ‘상고 출신’은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대학시절, 고등학교 이야기가 나오면 당연히 수능은 제치고 ‘유리한’ 내신으로 대학 왔냐며 삐딱하게 외로 보는 시선을 맞이해야 했다. ‘내신 등급은 8등급이었습니다만?’ 하고 받아치면 천재냐는 소리를 들었다. 아니, 너랑 나랑 같은 학교 학생인데 왜 내가 천재냐?

물론 한 번도 배워 본 적이 없는 교과목을 혼자 공부하면서 대학 입시를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머리가 좋은 덕일 수 있다. 잘난 척이 아니라, 내가 타고난 머리는 좋았으며 내 인생의 머리빨(?)은 딱 거기까지였다. 

(내가 나이 마흔 줄에 스무살 시절에 머리 좋았다고 떠들만큼 염치없지는 않다.) 


이후 글을 쓴다고 설치다 대차게 말아먹고 생계를 유지하려 보습학원 강사자리를 알아볼 때도 이력서에 쓴 한 줄 ‘**상업고등학교 졸업’은 걸림돌이 되었다. 영 못마땅 해 하는 원장 앞에서 내가 중학교 때 제법 공부를 잘했음을 구질구질 설명해야했다. 그 중에는 ‘상고 나오신 걸 보니 날라리셨봐요?’ 하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너는 앞뒤 막힌 꼴통이세요?     


그럼에도 따박따박 이력서에 ‘상고’를 기재한 것은 그 전에 최종학력만 적어서 이력서를 냈더니 채용 후 한참이 지나 대화 중에 ‘상고’ 출신임을 알게 된 원장이 ‘어머머, 당연히 여고 나왔는 줄 알았지. 안 되는데! 상고 나온 줄 알았으면 안 뽑았을건데.’ 라고 하더니 별 이유도 없이 일주일 후에 해고를 당했던 기억 때문이었다.     

만 15세의 선택이 내내 변명거리가 필요한 일이었을 줄은, 괜히 주눅 드는 콤플렉스가 될 줄은 몰랐다. 꽤 오랜 시간동안 ‘**상업고등학교’ 는 잘못한 것 없는데도 낯부끄러운 흉터가 되었다.     




글이라는 것을 쓴 날을 헤아려 보니 열 손가락을 훌쩍 넘긴다. 문득 자괴감이 밀려오면서 어떤 선택을 후회하기도 한다. 그냥 여고 가서 공부 열심히 하고, 안정적인 직업을 택했으면 좋았을 것을...하며 죽은 자식 나이를 세곤한다. 마흔 줄, 나의 불안정과 휘청거림을 두고  만 15세의 나에게 투덜거리는 것이다. 믿을 어른 하나 없었던, 그럼에도 쓸데없이 과감했던 나에게 어른이 된 내가 투덜거리는 것이다.


그런데 솔직히 돌아보자면 나는 실패한 적이 없었다. 내멋대로 고등학교를 선택했고, 다시 대학을 선택했고, 글쓰기를 선택했다. 어쨌든 적응을 못했던 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했고, 하루 5시간 이상 공부해 본 적이 없어도 대학을 갔으며(물론 10시간을 했다고 더 잘 갔을리는 없다. 그냥 그게 내 한계치였다.), 세상에 이름을 날리지 못했지만 ‘원고료’ 라는 것을 받아본 프로작가였다. 내가 하고자 했던 것들, 중간에 놓지 않고 끝까지 간 것들은 작든 크든 성공이었다. 많은 것들을 놓치고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 모든 것들은 내가 지레 겁먹고 포기한 것들이지 간절히 움켜쥐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투덜거리기에는 머쓱하다. 그리고 상업고등학교의 콤플렉스는 내게 세상을 향한 적당히 앙칼진 칼날이 되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책을 읽었고, 세상과 시사를 공부했었다. 




오늘부터 움직일 작은 목표를 두 가지 정했다. 그를 향해 집중하는 동안 조금 늘어졌던 일상의 텐션이 올라올 것이고, 이제 숨차게 달려갈 것이다. 요즘 들어 마냥 무기력하고 늘어졌던 일상에 긴장이 생긴 것은 어젯밤 문득 밀려온 ‘촉’이 놓칠뻔한 기회를 확인하게 했고 다소 촉박한 시간이지만 그에 도전하기로 마음 먹으면서였다. 당장 오늘부터 그렇게 늘어지던 아침잠이 저절로 달아났다. 이 모든 것들은 내가 끝내 놓지 않았던 마음이 ‘촉’이라는 이름으로 그쪽으로 이끈 것이라 믿는다.     


며칠 전 친구와 통화하는데 친구가 난데없이 니가 쓴 소설책을 서점에서 사고 싶다고 했다.

어쩌면 다음은 그 길이 될 수도 있겠다. 그 순간 내 마음이 설렌다면, 그 순간 내 마음이 그곳에 닿는다면, 그래서 그쪽으로 이끌린다면.



선생님 말씀대로 나는 상고를 갔으며 책상을 닦게 되었다.

그런데, 반질반질 마음을 씻어내듯 닦는 것은 작업실의 내 책상이다.               



나는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사람이다.

일상을 살고 있는 모두가 그렇듯이 나도 그렇다.

지금의 삶, 우리는 잘 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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