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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jak Sep 16. 2020

진공

전화기는 꺼져있고, 카톡은 거의 읽지 않으며, 툭하면 단톡방에서 탈출하는 사람이 있다. 연락이 잦은 편도 아니라서 특별히 연락이 없어도 별로 이상할 것이 없는 사람이다. 수시로 잠수를 타니, 주기적 잠수가 일상이 되었다. 주변인들의 불안은 이제 덤덤을 넘어 무심으로 바뀌었다.     


방 하나, 작은 주방, 욕실 겸 화장실이 딸린 작업실에 나와서 창문의 이중창을 꼭꼭 닫아놓으면 마치 진공의 공간인 듯 세상 밖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가구가 거의 없는 휑한 방은 간혹 콜록 하고 내뱉는 내 기침 소리가 메아리로 돌아오는 지독하게 공허한 공간이다.     

타박타박 슬리퍼 끄는 발소리, 의자 끄는 소리, 컴퓨터 자판 두드리는 소리만 겨우 이 안이 비어있지 않음을 증명한다. 실수로 물건이라도 놓치면 쨍하고 부딪히는 그 소리에 심장이 쪼그라들 듯 깜짝 놀라 지레 눈을 질끈 감아버린다. 너무, 커.               





작업실로 나오면서 매일 출근하는 기분으로 아침마다 샤워를 하고, 메이크업을 했었다. 마스카라까지 꼼꼼하게 바른 후에 집을 나섰는데 스스로 ‘출근하듯 일상을 다잡는 모양새’ 라고 그 모양을 규정했지만, 더 깊은 속내는 맨 얼굴로는 그 무엇도 마주하기 싫은 심상이었다. 어느새 세월의 자욱이 내려앉은 칙칙한 피부와 전에 없이 착하게 쳐져가는 눈꼬리가 못내 마음에 안 들었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 ‘친절해 보일까봐.’ 붉은 섀도우를 눈가에 덧칠하던 금자씨처럼, ‘착해 보일까봐’ 눈꼬리를 올려 메이크업을 했었다.      

혹시 동네 마트라도, 갑자기 볼일이 생겨 나갈 일이 있어도 무방비의 얼굴로 ‘아는’ 얼굴을 마주하기는 싫었던 탓이다. 여행지에서는 맨 얼굴이든, 당장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도 아까울 것 없는 옷차림이든 개의치 않고 고개 빳빳이 쳐들고 돌아다니면서도 내 집 앞에서는 온갖 치장을 한껏 하고서야 겨우 걸음을 뗀다. '나를 아는' 이들에게 무방비의 나를 내보이는 것이 지독하게 싫었다. 

     

그렇게 싫어하는 맨 얼굴로 나선 것이 3일 째이다. 요 며칠 손목 통증이 심해져서 미세한 동작이라도 손을 쓰는 일을 최대한 줄이고 싶었고 동시에 그 바탕으로 또 한 번 깊은 물속으로, 진공을 찾아들 때가 되었음을 알리는 알람이 울렸기 때문이다.     


잘 벼린 칼날만큼 날카로워져서 나와 스치기만 해도 핏물이 베어나올 것 같은 순간에 나는 되려 내 안으로 찔러드는 칼날에 언제든 왈칵 울음이 터질 준비가 되어있다. 

끝내 들키기 싫은 속내이다.     




'심야전기'라는 이 방의 난방형태는 밤을 이곳에서 지내지 않는 나에게는 아무도 없는 공간을 기약 없이 데우는 일이었다. 심야 전기가 끊기고 밤사이 덥혀졌던 온기가 식어가는 낮에 이곳에 돌아와 바닥에 남은 온기를 발바닥으로 더듬으며 정말 지난 밤에 이곳이 따뜻하고 뜨거웠는지를 가늠해야 했다. 몇 번쯤 밤에 보일러를 틀어놓고 집에 돌아갔다가 왔는데 날이 그렇게 차지 않아서인지 원하는 만큼 온도가 오르기도 전에 식어버린 모양이다. 뭐하는 짓인가? 허공에 전기요금을 흩날리는 짓인가? 마냥 서늘한 바닥을 맨발로 딛고 서서 실체가 없는 지난밤의 온기에 마냥 기대를 걸고 더듬더듬 찬 바닥을 밟는 일은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구들장을 덥히지 않아도 전기방석으로 엉덩이를 따뜻하게 만들 수 있는 세상이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전기방석을 깔고 앉아, 공기가 바뀐 계절을 핑계 삼아 엊그제 까지 벌컥거리던 아이스 커피 대신 진하게 내린 따뜻한 커피를 큼직한 머그컵에 그득 따라 마시면서 창문을 꼭꼭 닫아놓았다.

 

    


진공처럼 먹먹한 물 속 같은 공간에서 종일 책을 읽고, 그저 무언가를 두드리고 있다. 

창밖은 아마도 아까부터 내리던 빗줄기가 거세지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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