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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jak Sep 26. 2020

만 스물일곱 시간의 정체성

만 스물일곱 시간을 잠 한숨 안 자고, 책상 앞에 앉아있을 수 있을까?

가능한 일이다. 내가 그랬다.

소싯적 팔팔할 때야 뭘 못하겠는가.

다만 소싯적 팔팔할 때가 아니라, 엊그제였다는 게 문제다.

딱히 문제라고 할 건 없지만 나는 분명히 ‘정체성’이라는 글자를 치고 있는데 모니터에는 ‘젗헤서’ 같은 희한한 글자가 찍혀있는 일이 지금 여기까지 고작 몇 줄 안 되는 글을 쓰는 동안에도 어마어마(최초 동아에도 어마머아 라고 썼다.)하게 일어나는 후유증을 남기고 있다.     


동아에도 어마머아? 어이가 없어서 증거사진 첨부.



그렇듯 마음과 달리 손가락은 엉뚱한 글자를 치고 있으며(지금도 오타가 창궐 중이다. 오늘 백스페이스 열일한다.) 나의 척추는 하나의 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빳빳하게 굳어서 전후좌우 움직임이 거의 되지 않았다. 어제는 초저녁부터 푹 잤고 다행히 생각만큼 통증이 심하지 않아서 <해봄직한 짓거리>였다고 생각했으나 오늘 또 책상 앞에 앉아 있어 보니 ‘갔다.’      

자세한 이야기는 접어두고 스물일곱 시간은 내가 원해서 한 짓이다.

그 시간 동안 책상 앞에 앉아 인형눈깔 같은 것을 붙인 것은 아니니  뭘 쓰느라 그랬겠지.          




내가 브런치에 쓰는 글은 그저 잡문에 가깝다. ‘에세이’라고 어떻게 우겨볼 수도 있겠지만 딱히 메시지가 있거나 주제를 가진 글도 아니고, 매거진 제목처럼 그냥 글로 수다나 떠는 것이다. 그런 마음을 브런치도 잘 아는지 메인에 걸리거나, 조회수가 폭발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일견 다행이다. 나는 종잇장처럼 팔랑이는 멘탈을 가졌으므로  ‘일기는 일기장에.’ 같은 댓글이 달리는 일은 싫다.       


사실 한동안 접었던 브런치를 다시 시작했을 때는 만들어 낸 글을 쓰겠다 마음 먹었다. 그러나 만들어낸 글이라는 것은 <세상에 없는 인물을 창조해서 그 인물이 말이 되는 짓과 말을 하게> 해야 하는, 나라는 인간이 아무 짓이나 한 일에 대해 아무 말 대잔치를 하는 글과는 결이 달라도 너무 다른 일이다.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에세이나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다른 글을 싸잡는 것이 아니다. 오직 나에게만 해당되는 내 얘기다.)     


몇 번 짧은 소설 비스무리 한 것들도 몇 편 올렸지만 결국 <최작의 아무 말 대잔치>가 페이지를 잠식하고 있다.    



작업실을 꾸려서 나왔을 때 대단한 결심과 창대한 계획을 갖고 나온 것은 아니었다. 자다 말고, 진짜로 ‘자다 말고’ 작업실을 꾸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마침 <드럽고 치사하고 꼴같잖고 재수 없어서>안 받고 말겠다고 생각했던 돈이 들어와서 그냥 저질러 버린 것이다. 코로나 사태로 도서관이 문을 닫은 이후로 어딘가로 갈 곳이 필요했고 이카페, 저카페도 질려가던 차에 ‘커피값이나 월세나’라는 앞뒤 없는 단순 계산이 실행력에 불을 질렀다.

(그러나 실상은 월세 이외의 많은 것들이 얄팍한 통장을 텅장으로 만들고 있다.)     


시작은 물컵 하나, 머그 컵 하나였는데 어느새 컵은 네 개가 됐고. 반찬냄새가 나는 것이 싫어서 김치 한 조각 넣지 않았던 냉장고에는 밑반찬이 들어앉았다. 날이 추워지면서 점점 빨리 식어버리는 도시락이 먹기 싫을 때는 조리도구를 사 놓고 ‘끓이고 지지고 볶을까’의 유혹에 흔들리기도 한다. 김치찌개나 된장찌개, 버섯과 양파를 곁들인 호주산(한우는 비싸....)스테이크까지 오만가지 요리가 등장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간혹 오래 알고 지낸 지인들조차 ‘꼬라지를 보니 라면도 못 끓이겠거니’ 하고 나를 오해하곤 하는데 실은 밥 한 끼 해 먹는데 문제 없을 만큼은 할 줄 아는 게 좀 있다.     


그러나 내가 허용한 것은 냉장고 안의 밑반찬까지다. 그래서 나름의 방법으로 도시락에 국을 챙겨오면서 소금 한 숟갈을 넣는다. 먹을 때 포트에 물을 데워 부어 먹으면 적당히 따듯하고 간도 딱 맞다. 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지만, 처음부터 이 공간의 정체성은 집이 아니라 작업실이었다. 특별한 경우 몇 번을 제외하고는 집보다 수압이 좋은 욕실에서 샤워도 한 적이 없고, 밤을 새는 것은 괜찮지만 여기서 밤잠은 자지 않는다. 몇 번 아침 출근길에 문 앞에 세워둔 내 차를 본 친구가 가끔 거기서 자냐고 물어보기에 아침에 내 차가 보이면 거기서 잔 게 아니라 그냥 밤을 샌 것이라는 나의 ‘작업실 무숙박’ 원칙을 이야기했다.  진짜 ‘까칠한 년’이라고 고개를 젓는다.      


슬금슬금 경계를 넘어 공간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것이 싫었다.

더 깊은 속내는 공간의 정체성이 아니라 나의 정체성이 문제였다. 그렇게 까칠하게, 고집스럽게 ‘작업실’로 이름 붙인 공간에서 정작 ‘작업’은 뒷전이고 아무것도 안 하는 날이 더 많다는 것, 그에 대한 일종의 강박과 자책 때문에 더욱더 병적으로 이 공간의 정체성에 집착하는 것이다.     


책상 앞에 앉아 스물일곱 시간을 버티는 일은 누가 시킨다고 할 수 있는 짓이 아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성취감보다는 기막힌 허탈로 되돌아올 때가 훨씬 많다. 따지자면 실속 없는 미친 짓이다. 그런데 좋아서 하는 미친 짓이다. 그러니 꼿꼿하게 굳은 허리를 부여잡고 이 짧은 글을 쓰면서도 수백 번 오타가 창궐하는 지경에도 굳이 이 공간에 나와 앉아있는 것이다.      



스물 일곱 시간이 기특해서 시작한 글은 아니다.

서두에도 밝혔듯 나는 <만든> 글을 쓰고 싶었으나 하지 (안)하고 있다.

그래서 묻는 것이다. 뭐하는 인간이냐고.          


글쓰기, 오늘따라 부쩍 어렵다.

오타만 창궐한 게 아니라 여러가지가 창궐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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