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유튜브 알고리즘에 이끌려 드문드문 보다가, 결국 각 잡고 다시 정주행하고 있는 드라마가 있다.
디어 마이 프렌즈.
2016년에 방영된 작품으로,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삶의 황혼길, 지랄 맞게 살아냈으니 이제 아름답게 길 위에서 죽자는> 노인들의 이야기이다. 다 늙은 노인들의 이야기를 누가 보겠냐고 했다지만, 이미 연기력으로 자웅을 가릴 수 없는 베테랑 배우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잔잔한 톤으로 삶의 깊은 곳을 끌어내는 이야기는 극 중 주인공들의 살아낸 세월만큼이나 굽이굽이 찐한 감정의 속내를 바닥까지 내보이며 보는 이의 가슴 안에도 찰랑찰랑 물이 차오르게 했다.
개인적 호불호야 당연히 있겠지만, 나는 참 멋진 드라마라 생각한다. 특히나 드라마를 쓰고 싶었던 사람이기에 극을 이끌어가는 노희경 작가의 짙은 필력에 부러움과 창백한 질투를 섞어가며 눈을 똥그랗게 뜨고 노려(?) 보는 중이었다.
많은 부분들이 그러했지만, 나는 어떤 한 Scene에서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깊은 속내와 내 깊은 비겁을 모니터 안에서 똑바로 목도한 것이다.
나만 알고 있던 나의 속내를 누군가에게 적나라하게 들킨 기분이었다.
다 엄마 탓이지.
극 중 딸인 완은 엄마 난희에게 모든 것은 엄마 탓이라며 퍼붓기 시작했다. 사랑하던 남자와 헤어진 것도, 지금 이렇게 사는 것도, 다 엄마 탓이라고 소리 지르고 있었다. 6살 때 동반자살을 시도했던 기억을 끄집어내며 왜 나를 죽이려 했냐며 발악했다. 나에게 미안하다고 하라며 속된 말로 '지랄'을 하면서 부릴 수 있는 패악이라는 패악은 다 부리고 있었다. 꽃병을 집어던지고, 노트북을 내던졌으며, 깨진 유리파편 위로 맨주먹을 탕탕 내려쳤다. 딸을 끌어안으며 우는 엄마를 밀쳐내며 다 엄마 때문이라 소리 지르고 있었다.
눈물 나는 장면이다. 그러나 여기서 끝났다면 나는 꽤나 실망했을 것이다. 인간의 본질이란, 그렇지 않음을 나는 얄팍하게나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잘 빚은 이야기는 얄팍한 나를 가뿐히 뛰어넘었다.
화면 가득, 몸부림치는 모녀의 몸짓 위로 완의 내레이션이 흘렀다.
<<비열하고 비겁한 박완, 왜 너는 30년 동안 묻어둔 그 얘길 이제야 이렇게 미친년처럼 터트리는데. 너는 그때도 엄마를 이해했고, 지금도 엄마를 이해해. 그런데 너는 왜 지금 엄마를 이렇게 원망하는 건데.>>
그리고, 내가 이렇게 된 건 다 엄마 탓이라고 절규하는 완의 목소리 위로 또 내레이션이 흘렀다.
<<그때야 알았다. 나는 연하를 버린 나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연하를 버린 게 내 이기심만은 아니었다고. 이유가 있었다고 변명하고 싶었다. 내 탓만 하기엔 너무나 힘이 들어서 누구 탓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게 만만한 엄마였다.>>
나도 그런 적이 있었다. 늙어가는 아버지를 앞에 두고, 당신 때문에 나는 힘들었고, 지독하게 상처 받았었고, 당신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었고, 당신 때문에 사람이 밉고, 사람이 싫었다고, 그래서 감히 행복을 꿈 꿀 수도 없었다고, 그렇게 당신이 딸년의 인생을 망쳤으니 미안하다고 사과하라고 했었다.
당연히 아버지는 사과하지 않았다. 그리고 엄마는 닫힌 방문을 두드리며 숨이 넘어갈 듯 나를 달래고 있었다. 뭘 잘못했다고 당신이 잘못했다며 그만 하라고. 그만 하라고. 쥐어 짜 내는 목소리로 닫힌 방문을 두드렸다. 그럴수록 나는 옥타브를 높여 소리를 질렀고, 아버지는 끝끝내 사과하지 않았다. 사과는커녕 내가 끔찍하게 싫어하는 그 특유의 표정으로 실실 웃었다.
결국, 나의 아버지는 용기 내서 그 앞에 앉은 딸을 끝까지 무시한 잔인하고 비정한 아버지가 된 것이다. 그렇게 나는 죄책감 없이 아버지를 미워할 자격을 얻었다.
솔직히 말해볼까? 모든 것이 나의 연극이었다.
당신이 가장 약한 틈을 타서, 절대 사과할 리 없는 당신의 성정을 알면서, 게다가 술이 취해 이성을 지킬 수 없음을 알면서, 그 앞에 앉아 받을 수 없는 사과를 받아내겠다고 한 것이다. 끝끝내 나는 불쌍한 인간이고, 끝끝내 나는 상처 받고, 이해받지 못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했으되, 당신이 밀어낸 것이어야 했다.
그러니까, 내가 이루고자 하는 길의 어느 한 자락도 이루지 못한 나의 찌질함을 변명하고자 그저 늙고, 무식하고, 그래서 약아 빠진 연극 따위는 하지 못하는 늙은 부모를 앉혀 두고 한 없이 영악한 내가 앙큼하게 연극을 하며 당신들 탓을 한 것이다.
드라마를 보면서 하필이면 그 바닥을 들켜버렸다. 그러니까 내가 쌍년인 것이다.
그래, 모든 것은 내 탓이다.
내가 게을렀으며, 내가 비겁했으며, 내가 핑계 투성이, 변명 투성이었다.
불쑥, 그야말로 어제 갑자기 불쑥, 당신이 학교만 제대로 다녔어도 이렇게 살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그랬으면 너도 안 태어났을 것이라며, 괜히 피싯 웃는 늙은 엄마와 근 1년 사이에 10배쯤 쇠약해진 몸으로 이제는 뼈만 남아 온몸의 삶이 빠져나가는 것이 한눈에 보이는 늙은 아버지를 탓할 것이 아니라, 나의 비겁과 두려움을 탓해야 했다.
최근에 챙겨 보았던 다른 드라마가 있었다. <나빌레라>
나이 70에 발레가 하고 싶은 할아버지와 방황하는 청춘, 발레리노 청년의 이야기였다.
젊은 남자 주인공이 멋져서 보기 시작했는데, 결국엔 할아버지에게 마음이 더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더라. 나도 늙어가나 보다.
할아버지가 그랬다. <내가 살아보니까, 완벽하게 준비된 때는 없어. 그냥 해. 부딪혀.>
나는 늘 핑곗거리를 찾았으며,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고, 잠잠하게 아물어 가는 상처를 긁어냈고 그것을 극복하는 척해야 했으며, 그래서 준비가 더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나 솔직히 나는 나를 아는데, 처절하게 깨져본 적도 없으며 제대로 싸워본 적도 없다. 그저 무서운 것일 뿐, 뭐 하나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