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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jak Apr 26. 2021

다시 뵐 일이 없길바래요.

싼 값에 눈이 돌아가 덥석 사온 딸기가 문제였다. 정확히 일주일 전, 4월 19일. 마트에서 세일 라벨이 붙은 딸기를 샀다. 겉보기에 조금 시들해 보이긴 했지만 바로 먹을 것이라서 좀 도려내고 먹으면 되겠지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씻으려고 보니 시들한 정도가 아니라 곰팡이가 피고, 그 주변까지 곰팡이가 번졌으니 딸기 상태는 정말 할 말이 없었다. ‘그나마 먹을 만’ 한 것들을 헤아려 보니 1kg 한 상자에 과장 보태지 않고 다섯 개? 곰팡이 핀 썩은 딸기는 흐물거리다 못해 녹아내리는 중이었다.     


아니, 지금 내가 내 돈 주고 내 시간을 들여 마트 짬 처리를 하는 중인가? 확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녹아내린 딸기, 썩은 딸기, 곰팡이 핀 딸기와 그나마 멀쩡(?)한 딸기를 주섬주섬 담아 마트로 가져갔다. 환불을 요청하면서 직접 눈으로 확인하시라며 직원에게 한 때 딸기였던 것(?)들의 잔해를 내밀었다. 당연히 미안하다고 하고, 환불을 해주겠다고 했고 책임자라고 하는 부점장이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그런데, 이 부점장, 굳이 보태지 않아도 될 말을 한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포장이 되어있다 보니 저희도 상태를 다 알 수 없고요.. 게다가 세일 상품이고......”

“아무리 싸게 팔아도, 쓰레기를 돈 주고 사가서 시간 들여 처리할 구매자는 없습니다. 사람은 싼 물건을 보면 상급의 상품을 기대하지는 않아도 최소한 먹을 수 있는 상태를 기대합니다. 이 상황에서 싸게 파는 물건을 산 구매자가 잘못은 아니잖아요.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안 되죠.”          

“아, 예. 죄애~송합니다.”  

   

아.... 예? 죄애~?     


이건 다분히 비아냥으로 느껴졌다. 싸게 산 물건에 흠이 있는 건 당연한데, 굳이 들고 와서 진상을 피냐는 건가? 지금 나 싼 거 사는 사람이라고 무시하는 거야??????...... 워워, 거기까지 갈 것은 없다. 

솔직히 살짝 '뭐지?' 싶었지만, 굳이 언성 높일 일도 아니고, 객관적으로 증명할 길 없는 상대의 태도를 꼬집으며 감정싸움할 일도 아니었다. 그의 말투에서 짜증이 느껴진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역시 내 감정의 필터를 거친 해석일 뿐이니 그냥 그 정도에서 딸기 해프닝을 마무리지었다. 마트에서는 보상금이라며 3000원을 쥐어주었다. 매뉴얼이라나?      


그리고 나는 앞으로 세일하는 과일은 쳐다보지 않기로 했다. 크고 싱싱한 것들만 먹기로 했다. 

빈티도 아니고 원.     




딱 일주일이 지났다. 

    

이거 다 썩은 오렌지.


세일 상품 아니고, 정상품이다. 모두 오늘 산 것들이며, 겉보기에는 무리 없이 탱탱해 보였다. 그러나 저만큼이 다 곰팡이거나 한쪽이 썩었다. 비닐포장이 함정이었으나 그걸 열어서 확인할 생각까지 할 수는 없었다.상품명까지 인쇄된 도톰한 비닐포장이 오히려 깔끔하다 생각했다.


아니, 요즘들어 왜 이렇게 과일이 당기는지, 생수를 사러 간 마트에서 난데없이 또 과일이 먹고 싶었다. 딸기는 트라우마가 걸릴 지경이라 패스, 토마토는 원래 좋아하지 않고, 사과는 제 철이 아니고, 바나나는 금방 물러지고, 자몽은 그냥 먹는 것보다는 청을 담는 것이 좋은데, 청 담을 여유는 없고.... 등등... 그리하여 오렌지였다. 그런데 사온 오렌지의 비닐 포장을 열어 냉장고로 옮기려는 순간 우르르 튀어나오는 곰팡 곰팡... 물컹물컹.


결국 또 마트로 갈 수밖에.      




이번에는 처음부터 책임자를 불러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일주일 만에 다시 만난 부점장은 ‘또, 이 여자야?’ 싶은 표정이다.

나야말로 하고 싶은 말이다. ‘왜 또 나야?’    


그는 상태를 보시라며 내민 오렌지 봉투를 들고 매대에 우르르 쏟더니, 곰팡이 핀 것들만 쏙쏙 골라내어 옮기면서 오렌지를 두 그룹으로 나눠 놓았다. 그러면서 곰팡이는 피지 않았지만 이미 물러져 버린 것들도 정상(?) 범주 안에 집어넣고 곰팡이 핀 것들을 가리키며 “요 정도가 상했네요.”라는 말을 굳이 덧붙인다. 


내가 궁예도 아니고, 그의 속마음을 다 읽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의 행동에는 적잖은 짜증이 섞여 있었다. 그 짜증을 읽은 순간 나의 짜증 역시 치솟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곰팡이 핀 것 말고도 이미 많이 물러있고, 만약 입장을 바꿔 이걸 사셨다면 그냥 드시겠어요?”

“죄송합니다. 근데에~ 곰팡이 핀 건 저희 관리 잘못이라고 볼 수 있지만 물컹한 것은 거래처에서 이런 물건을 보낸 겁니다. 저희도 열어보기 전까지는 몰라요.”

“그걸 제가 알아야 돼요?”     


까칠함이 튀어나왔다. 진심으로 내가 어디 가서 버르장머리 없이 행동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까칠한 구석이 분명히 있다. 이럴 때면 나도 어쩔 수가 없다.      


“그건 거래처와 업장이 알아서 할 일이지, 구매자가 알아야 돼요? 제가 지금 막말로 진상짓을 하면서 언성을 높였어요? 아니면 과한 요구를 했어요? 저는 썩은 오렌지를 내 돈 주고 산 죄로 지금 제 시간 들여서 이러고 있는 것도 짜증 나는 데, 구매한 곳의 책임자라는 분은 상품 하자는 본인들 책임이 아니라면서 짜증 조로 대답하시면 제가 뭐라고 해야 합니까? 공산품도 아니고 식품인데, 최소한의 신선도는 보증하는 비용까지 판매가에 포함되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모른다 하시면, 제가 선도 떨어진 오렌지 들고 오렌지 농장으로 가요?”     


잠시, 찬바람이 불었다.     

곧, 부점장이라는 남자가 사과를 했다. 


그리고 나는, 나는 지난번에도 관리를 잘하겠다고 하셔 놓고 또 과일 때문에 오게 된 상황이 굉장히 짜증 난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냥 근무하시는 분들에게 말씀드리고 환불받으면 그만이지만, 기왕이면 자주 이용하는 마트에서 같은 상황이 또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에 관리 권한이 있는 책임자가 대응해주기를 바랐을 뿐, 쌍팔년도 드라마에서나 하는 짓처럼 ‘높은 사람 나오라고 해!’를 빽빽 거리고 싶은 것도 아니다. 사람은 저마다의 감정이 있으니 부점장님 역시 같은 사람이 일주일 사이에 두 번이나 항의를 하는 이 상황이 짜증 날 수도 있고, 그 짜증이 순간적으로 묻어난 것이라 생각한다. 이해의 범주에 속하는 일이지만 나로서는 황당할 따름이라 나 또한 반응이 그렇게 까칠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점은 나도 대응이 유연하지 않았으니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어떤 오해와 선입견으로 지금 나를 대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상황을 과장하지는 마셨으면 한다. 이 상황에서 내 잘못은 하나도 없는데,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허허허 웃으면서 넘어가 주지 않은 것을 내가 반성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에 대한 짜증을 상대가 알아챌 정도로 내실일은 아니지 않는가 라고 '다다다다다다' 말했다.      


그러고 나서는 또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미친건가?)

아니, 이 심각하고 진지한 말들의 핑퐁이 오렌지 때문에 해야 할 대화인가? 가뜩이나 노화중이라 성대도 늙어가는데, 내 귀한 성대를 이런데 써야 하나? 모든 상황이 그저 웃겼다. 그래서 피식 웃었다.     


내가 웃어버리니 맞은편의 그도 머쓱하게 웃었다. 그리고 자신이 실언을 했다며 다시 한번 사과했다. 

그 와중에 나는 너무 정중하게 사과하시면 부담스러우니 그쯤 해 두시라고 했다.(이건 또 무슨....)

결국, 부점장이라는 남자와 나는 서로 어이없이 웃고 말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싱싱한 오렌지를 골라서 한 봉지 담아주고, 덤으로 포도까지 안겨주었다. 솔직히 괜히 찜찜했다. 요즘 세상에 진상을 떨어야 대접을 받는다고 하는데, 내가 꼭 진상이 된 기분이었으니.    

그러나 죄책감 느낄 일이 아닌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기로 했다. '진정성없이 괜히 아무때나 착한병'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세상만사 나만 피곤한 병이니까.            


아무튼 나는 할 말을 했을 뿐이다.

보상을 바라고 한 일도 아니고, 분풀이를 한 것도 아니다. 

어떤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은 모두가 다르며, 그 정도까지 할 일인지 아닌지도 내 맘이다.

나는 오렌지 몇 알 때문에 마트에 쫒아가는 사람이다. 그러다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오는 사람이다. 어쩔 건가. 이렇게 생겨먹은 것을.          




“혹시, 다음번에 또 문제가 생기면 저는 어디에 말을 해야 하나요?”

“..... 그런 일은 없어야겠지만, 혹시 만에 하나 그렇다면 또 저한테 말씀해 주셔야죠.”

“다시 뵐 일이 없길 바랍니다.”     


또 한 번 웃고 말았다.

이제 그 마트에서 과일은 사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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