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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jak Apr 24. 2021

너는 빛나고 있구나.

그런 적이 있었다. 


한적한 시골 소도시에서 유유자적, 평안하게, 혹은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살다가 불쑥 가슴이 답답해지곤 했다. 그럴 때면 서울 행 고속버스를 탔다. 터미널에 내려서 정신없는 식당에서 꾸역꾸역 밥을 먹고, 지하철을 탄다. 만날 사람도, 갈 곳도 없었다. 그저 한낮의 인사동을 맥없이 걷기도 하고, 카페에 들어가 커피가 식어빠지도록 '그저' 앉아있었다. 그러다가 하늘에 붉은빛이 퍼질 무렵, 그리고 곧 해가 질 시간이 되면 다시 지하철을 타고 복잡한 거리로 나섰다. 종로, 혹은 광화문 조금 더 멀리 여의도나 강남까지. 퇴근길 인파에 섞여 숨이 턱턱 막히는 콩나물시루 지하철을 타고, 역을 빠져나와 징글징글한 인파를 뚫고, 복잡한 거리 어드메쯤에 뚝 떨어져 갈 곳 없이 서 있었다. 해가 져서 어둑한 거리에 서서 소음과 뒤섞여 끝없이 이어지는 차량 불빛을 넋 놓고 보거나, 횡단보도와 횡단보도를 잇는 섬 같은 그곳에 멈춰 서서 오도 가도 않고 물끄러미 하늘을 보기도 했다. 추운 날이거나 더운 날이거나 서울의 하늘은 언제나 별이 없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내 마음 안에서는 찌릿하게 빛이 울렸다. 모두가 뜨겁게 살고 있구나. 나의 위장된 평안에 툭 던져진 돌 하나가 나의 고개 돌린 잔잔함 위에 자르르 파도를 만들었다. 

          



과장이 아니라, 진정으로 작년 여름 대비 10킬로 정도 살이 쪘다. 무슨 옷을 입어도 태가 안나는 것이 제일 짜증 나는 일이며, 더불어 호흡이 가쁘고, 뱃살을 지탱하느라 허리가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다. 그 고생을 알아달라는 듯, 밤이면 티 나게 더 아픈 허리 때문에 끙끙 앓는 일이 일상이다. 다이어트 약을 복용해 볼까, 극단적 단식으로 일단 빼고 나서 유지해볼까, 혹시 운동이라도 해볼까 싶어 이것저것 고민하고 알아보았으나 금전적 한계와, 체질, 성향을 고려할 때 하나씩 접어야 했다. 가장 최근에 필라테스에 마음이 갔었으나 필라테스 학원에서 '홍보용'으로 올린 동영상을 보고 바로 마음을 접었다. 내 기준,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나마 할 수 있는 것이 걷는 일이니 일주일에 두어 번이라도 걸어보자고 마음먹었다. 물론, 그런다고 살이 쑥쑥 빠질 리 없으나, 삶에 일정한 루틴을 주고 하기 싫은 그 순간을 이겨내는 일이 지금 나에게 필요한 처방이라 생각했다.     




늘 그렇듯 호수를 찾았다.

겨울에 한두 번쯤, 막 시작하던 봄날에 한두 번쯤 찾은 기억이 있는데, 어느덧 봄이 짙어질 대로 짙어져 있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딱 두 번 호수를 걸었는데, 첫날은 해 질 무렵 내리는 노을이 아름다운 날이었고, 두 번째 날은 지독하게 흐린 날이었다. 흐린 날을 핑계로 슬그머니 걷기를 접으려 했으나 하기 싫은 그 순간을 떨쳐내는 것, 그나마 그것이 나에게 덕지덕지 처 발린 위장된 평화와 거짓 평안을 깨부수는 일의 시작이었다. 나는 사실 무엇보다 그것이 필요했다.

  

걸음걸이가 쉽지는 않았다. 한 걸음을 뗄 때마다 ‘어이구, 내가 여기도 아팠나?’ 하는 마음이 들 만큼 발바닥, 발목, 종아리, 허리에서 통증이 불쑥 불숙 튀어나왔다. 콕콕 찌르기도 하고, 쓰라리기도 하고, 걸을 때마다 몸이 뒤틀리는 것 같아서 괜히 몸을 이리저리 틀어보곤 했다. 얼마 전에 내 낡은 자동차의 핸들이 틀어지는 현상으로 '휠 얼라인먼트' 인가 뭔가를 잡고 왔는데, 차나 주인이나 틀어지는 것은 매 한 가지였나 보다. 문득 사람 정비는 어디서 해야 하나, 고장 난 자동차처럼 나도 기계에 올려서 이리저리 두드리고, 끼워 맞출 수는 없나. 하고 실없는 생각을 잠시 했었다. 

     

마음이 동할 때는 세 바퀴까지 돌던 호수였지만 겨우겨우 숨이 차도록 한 바퀴를 채우고 나니 더 이상은 무리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 마음을 알았는지 잔뜩 흐린 날씨에 바람까지 세 지면서 이제 그만 하고 내려가라 등을 떠밀며 재촉했다. 


그런데 그때 문득 나무 한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사방이 잿빛인 그 순간에, 유독 연둣빛을 뽐내는 나무.      

큰 벚꽃나무였을 것이다. 겨울부터 늘 보던 그 나무였다.

흐린날 답게 우중충한 하늘과 그 하늘빛을 그대로 품은 잿빛 호수, 그리고 주변의 버드나무와 다른 벚나무들 모두 흐린 날씨, 흐린 하늘색에 물들어 온통 칙칙하던 그 순간에 그 나무 한그루는 제멋대로 빛나고 있었다.  


‘연두’라는 색깔이 딱 저 색깔이겠구나 할 만한 딱 그런 색깔로 한껏 빛나고 있었다. 큼직하게 땅을 딛고 선 몸통과 쭉 뻗은 가지, 그리고 그곳에 매달린 야들야들한 여린 잎이 파르르 바람에 떨리는 순간마저 반짝이고 있었다.

     

그래서 한참을 그곳에서 나무를 바라보았다. 별 생각을 한 것은 아니다.  너는 빛나고 있구나. 너는 빛나고 있구나. 답을 할 리 없는 나무에게 실 없이 말을 걸었다.     








너는, 빛나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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