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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jak Mar 16. 2021

갑분 인간관계 정리, 그리고 함부로 말랑해지지 말지어다

   

며칠 전에 휴대폰을 바꿨다. 액정에 번인 현상도 있었고, 간혹 충전도 오락가락하던 터라 바꿔야지 생각만 하고 있다가 인터넷 마켓에 저렴한 조건으로 적당한 기기가 나왔기에 절반은 계획적으로 절반은 충동적으로 바꾼 것이다.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최고급 사양의 최신폰이 한껏 유혹했지만 휴대폰은 시계와 간단한 인터넷 검색 기능 외에는 별로 쓰는 일이 없기에 보급형 라인이면 충분했다. 이만하면 쓸만하다 싶어서 홀린 듯이 구매를 마쳤다. 


그렇게 인터넷으로 구매한 새 폰은 며칠 만에 택배로 도착했고 old&new 양쪽 폰에 앱 하나씩만 깔면 주소록부터 사진까지 모든 데이터를 옮겨주니 굳이 대리점을 찾을 이유도 없었다. 사실 휴대폰 대리점에서 저가의 보급형 폰을 구매하려고 할 때면 종종 푸대접(?) 받는 기분을 맛볼 때도 있었는데 그런 불편함까지 말끔하게 날려주니 문제 될 것이 전혀 없었다. 

     

구 폰의 유심을 빼서 신 폰에 꽂으니 과거의 폰은 더 이상 전화의 역할을 수행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저 낡은 기계일 뿐이다. 데이터를 옮겨주는 프로그램으로 성공적으로 모든 데이터를 옮겼으며 사진이 담겨있던 sd 카드도 빼서 새 폰으로 옮겼다. 모든 것이 이동되었다. 낡은 과거에서 새로운 현재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 폰에 비밀번호를 설정하고, 잠금해제용 지문등록까지 마쳤다. 

이 모든 과정을 셀프로 해 낸 자신이 어찌나 기특하던지. 그렇게 나의 영민함(?)을 혼자 뿌듯해하고 으쓱해하며 이 모든 의식의 마무리로 구 폰의 연락처를 말끔하게 날려버렸다. 뒤돌아 보지 않는 쿨한 여자! 이것이 복선이다. 그러하다. 인생, 단박에 아무 문제없이 굴러가는 일은 없다.     





모든 과정에 있어 단 하나의 오류도 버벅거림도, 헤맴도 없었으나 새 기기를 피씨에 연결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조금 생겼다. 이럴 때 제일 좋은 방법은 껐다 켜는 것이다. 그래서 폰을 껐다 켰다. 잠금을 풀려고 하니 다시 시작 후에는 비번을 입력하란다. 늘 설정하던 그 숫자. 어딜 가나 똑같은 그 숫자 네 자리. 눈감고도 찍을 수 있는 그 네 자리를 눌렀다. 오류! 다시 눌렀지만 오류! 

     

????????     


이 숫자를 두 번 입력해서 최종 설정을 마친 후에, 지문 등록까지 마쳤는데 아니라고?

시도 횟수를 초과해서 30초 후에 다시, 다시 눌러도 마찬가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 이럴 때 쓰는 말인가 보다. 진짜 귀신이 장난을 치나? 아니면 내가 잠시 블랙아웃에 빠진 사이 또 다른 나의 인격이 제멋대로 다른 번호를 입력하기라도 한 것인가?     


그 와중에 엄마님이 전화를 하셨다. 아빠가 다니는 병원이 블라블라 약이 블라블라 전화로 처방을 받았는데 블라블라 입금을 해 줘야 하는데 블라블라, 내가 카드번호를 불러 줄 줄을 몰라서 블라블라 니가 하면 안 되냐 블라블라! 알겠으니 병원 전번을 불러라 블라블라........ 블라블라... 블라블라...    

 

하지만 이 전화는 비번을 입력할 수가 없으니 받을 수는 있으되 걸 수는 없는 상태. 엄마님의 요청을 수행할 수가 없었다. 결국 다시 유심을 빼서 구 폰에 넣고  엄마님의 요청을 마무리했으나, 이제 새 폰이 문제다. 시간을 보니 오후 5시 언저리. 서비스센터가 문 닫기 전이다. 서비스센터를 찾아가며 일말의 희망을 가졌으나 결국 초기화밖에 답이 없다는 결론이 도출되었으며 나의 새 폰은 초기화되었다.


애써 옮긴 모든 것이 날아갔으나 ‘내가 하는 짓이 그렇지.’ 타령을 읊조리며 프로그램을 이용해 데이터를 옮겼다. 개인적으로 깔아 둔 앱이나 기타 등등은 다 옮겼는데, 문제는 연락처였다. 나는 미련 없는 쿨한 여자라며 과거 폰에서 시원하게 날려버린 그 연락처.     




카톡을 열어보니, 개인 카톡은 최근 이틀 사이에 연락한 카톡이 아닌 경우 사악~ 사라지고 없고, 대학 동기 단톡 방 하나만 덜렁 있을 뿐이다. 원래도 연락이 잦은 편이 아닌 인간이고, 인간 유유상종이라 꼭 나 같은 인간들끼리 친하니 이 썰렁함도 무리는 아니었다. 대학 동기 단톡 방에 이 사정을 알리고 연락처를 득하였으나 한 두 개 입력하고 나니 이조차도 일일이 입력하는 일이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부터 나에게 전화를 걸어라!라고 요청했다. 누구냐 넌? 을 몇 차례 반복한 끝에 겨우 7개를 채웠다.   

   

그리고 최근에 연락했던 친구 둘에게 톡을 날려 같은 짓을 반복하고 나니, 이마저도 귀찮아졌다. 아휴, 뭐 연락할 일이 있으면 그때 말해야겠다 생각하고 연락처를 ‘득’하는 과정을 집어치웠다.     


그렇게 나의 새 폰에는 가족 연락처 포함해서 달랑 10개 남짓한 연락처만 남아있다.     


인간관계가 좁다 못해 빨대 같은 형국이라 기존에 저장된 연락처도 몇 개 되지 않았고 그중에서 1년 이상 연락한 적이 없는 전화번호가 태반이었으니 이참에 훌훌 털어버리는 것도 괜찮았다.  


혹시 가까운 시일 내에 연락처에 없는 누군가가 전화를 해 온다면, 그의 목소리를 기억하려 기억 저편을 더듬거리고, 일단 시치미를 떼고 반가운 척을 해야 할 판이다. 일 관계로 전화를 한 경우는 대부분 소속을 밝히니 문제는 없을 테고. 




알바를 시작한 지 2주 차에 접어들었다. 여전히 잠과의 싸움이고, 태초의 결심과는 달리 글 쓰는 시간은 생각만큼 녹록하지 않다. 익숙하지 않은 이른 기상 탓에 컨디션을 맞추려면 꼭 낮잠을 자야 했고, 아르바이트하는 시간과 개인 시간을 모두 합쳐 거의 하루 종일 앉아있다시피 해서 허리 상태가 꽤나 말썽이다. 자본주의에 충실하다 보니 아침 여섯 시 반에는 욕을 욕을 하면서도 눈을 뜨지만, 반대로 혼자 버텨야 하는 글 쓰는 시간이 슬그머니 느슨해진다.     


그러나 안주하고 싶지 않아서, 혹시라도 그냥 이대로 살고 싶어 질까 봐 하루 네 시간짜리 알바를 구했다. 안주하기엔 너무나 스몰 한~ 수입이다.      

그러니까 결국 나는  글을 써야 할 것이다. 함부로 말랑해지지 말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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