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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jak Jan 28. 2021

독을 풀고, 독을 품다.


겨울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여행 중에는 겨울 날씨답지 않게 마냥 따뜻하더니, 지금 밖에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중입니다.  

매일 영상을 웃돌던 기온이 현재는 영하 4도, 내일은 영하 10도 아래로 떨어질 것이라는 예보입니다.     

여독이 쌓여서인지 삭신이 쑤시고, 여행 내내 과한 먹부림을 부린 탓에 살이 토실토실 오르고 아랫배가 아직도 묵직합니다. 그 독을 풀어내느라 하루 종일 허브티를 물처럼 마시고 있습니다.

과학적 근거는 1도 없지만 왠지 풀을 우려낸 물(?)을 마시면 맑아지고, 가벼워 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요. 그에 더해서 '나는 깃털이다. 깃털이다.' 하며 근거없는 주문을 중얼거리고 있습니다.  

              





시시각각 다른 얼굴, 바다



바다의 풍경은 쨍하도록 아름다웠습니다.

그야말로 눈이 부시도록 푸르고, 바람이 와서 살결마다 닿는데도 이것이 꿈인 듯 현실감이 없습니다.      

하늘도 맑고, 바다고 맑고, 비릿한 삶의 현장, 칠흑같이 어두운 밤바다, 소박한 항구와 멀리 우뚝 솟은 고층건물의 묘한 이질감이 자아내는 풍경도 매혹적입니다.


그렇지만 여행객인 나와 그곳을 터전으로 사는 이들의 무게를 같은 추에 올려둘 수는 없습니다.      

내가 아름답다면서 감탄을 쏟아내던 오징어 배의 불빛이 누군가에게는 고단한 삶의 전쟁터일 지도, 재밌는 풍경이라며 카메라에 담았던 바닷가에서 꾸덕꾸덕 말라가던 생선, 그런데 그것을 내 건 이의 손은 거친 바닷바람에 툭툭 터졌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들 중 누군가는 넉넉한 삶을 살 테고 어떤 이는 조금 더 고단한 삶을 살고 있겠지요. 어느 곳이든 사람이 사는 곳은 다들 그러하니까요.


고개를 돌려보니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언덕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가파른 길을 따라 자리 잡은 알록달록 벽화길을 찾은 관광객들은 연신 셔터를 눌러대기 바쁠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사는 어떤 이는 하루 종일 바다에 지친 몸을 이끌고 올라와 겨우 몸을 누이는 소박한 한 평 땅 조차 낯선 관광객들의 인증샷의 소품이 되는 것이 못마땅해서 불퉁하게 눈을 흘기기도 합니다. 이번에는 그 벽화길을 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들을 모두 헤아려, 배려를 하느라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단순히 힘들어서요. 여러번 오다보니 많이 보기도 했고 힘든데 굳이 올라가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사실 저는 어느 지역을 가든 가파른 바닷가 언덕 위의 마을마다 그려진 알록달록한 벽화들이 영 꼴뵈기 싫습니다. 본질을 무시하고 덧바른 허위 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실제로 저는 그 마을이 아름다운 벽화로 치장되기 전에 회색빛 시멘트 벽이 미로처럼 얽힌 그곳을 간 적이 있습니다. 높은 곳에서 보이는 탁 트인 바다 풍경에 감탄하면서 이런 곳에 집이 있나 싶도록 오종종 모여있는 집들을 신기한 시선으로 넘겨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겨우 내 키의 반 밖에 닿지 않는 낮은 담벼락 너머로 바닷바람에 조글조글해진 할머니 한 분이 걸레를 탁탁 털고 안으로 들어가면서 ‘어유, 씨부럴.’이라고 하시더군요. 무안한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누군가의 삶의 터전을 제멋대로 넘겨보던 저의 몰염치가 낯부끄러웠습니다. 동시에 일상의 삶은 그 모양이 무엇이든 낭만이 되기 힘들다는 것을 어스름 알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여행의 끝무렵, 저녁 바다에 달이 비치던 즈음, 이제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 생각하니 마음이 한없이 시무룩해집니다. 돌아오자마자 풀썩 누웠지만 쉬이 잠이 들지는 못했습니다.

몸의 피곤을 이기는 것이 마음 안에 깃드는 깊은 상념이니까요.     




뒤틀린 허리,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작업실로 나왔습니다.

흩뿌리던 눈발이 여려지는가 싶더니, 창밖으로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바람이 붑니다.       



눈발이 휘날리더니,  몽땅 집어삼킬 것 같은 바람이 부는 현실의 공간.

   

여행이 끝났습니다. 거짓말처럼 따뜻하던 날이 사라지고 아직 지나가지 않은 겨울의 추위가 바람을 몰고 와서 버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시끄러운 삶의 가운데로 성큼성큼 걸어가야 합니다.

여독은 씻어 보내고, 목표로 하는 것들을 앞에 분명히 두고 그것을 향해 단단하게 독을 품으려고 합니다.


오래전 바닷가 언덕 위에서 슬그머니 엿보았던 삶의 속살처럼, 저의 삶도 낭만 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기약 없는 글쓰기와 쪼들리는 현실, 마음 같지 않은 체력, 머릿속에 맴도는 막연한 무엇을 제대로 구현해 옮겨내지 못하는 재능의 한계.

낭만은커녕, 매일이 찌질함과의 싸움입니다. '오늘은 어제보다는 덜 찌질하게 해 주세요.' 기도라도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사는 일이 낭만이 아니라 치열한 싸움이라는 점은 묘하게 저를 즐겁게 합니다. 적당한 쌈박질은 긴장을 주고, 긴장은 전의를 불러오며, 되거나 말거나 일단은 승리할 것 같은 흥분을 일으킵니다.

가끔씩 만나는 아름다운 여행의 풍경은 일상이 지독할수록 더 말랑한 법이니까요.



이보시게, 인생. 어디 한번 가보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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