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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jak May 26. 2021

15년이 남았네.

15년 남았다. 입버릇처럼 중얼거리는 말이다. 누군가는 부정 타는 소리라며, 재수 없는 말이라며 야단을 치기도 하지만, 나는 그냥 반 정도의 진심으로 뇌까리는 중이다. (이러다가 사는 게 졸라 재밌으면 더 살고 싶어 질지도 모르니까.)


사십여 년을 살았는데, 살아온 날 보다 남은 날이 길지 않음을 떠올리니 섭섭한 것도 사실이고, 당장 어떻게 될지 1초 앞을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인데, 이 얼마나 오만한 말인지도 잘 알지만 나는 15년 정도만 더 살고 싶었다. 대신 그 시간을 정말 꽉 차게 살고 싶었다.


고부라진 허리로 진통제를 털어먹으며 사는 지독한 노년보다는, 그냥 노년의 초입쯤에서 아직 제 발로 땅을 딛고, 가끔 하늘을 보며 시익 웃을 수 있을 때, 이만하면 됐다 말하고 싶었다.      

사람이니 후회는 어쩔 수 없겠으나, 그래도 애썼다고, 사느라 고생했다고 스스로 안아줄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살고 싶었다.     


솔직히 두려움이기도 하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어떻게 생겨 먹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빈곤, 가난, 고독사, 홈리스, 쪽방촌 등이 자꾸 추천 영상에 떠오르고, 언제 멈춰도 이상하지 않을 낡은 자동차를 심란하게 바라보며 그것조차 없으면 단돈 몇 푼이나마 벌어들이는 알바 자리에 출근하는 일마저 곤란한데, '어떻게 올해까지만 버텨 주지 않겠니?' 하는 비루한 바람을 알아듣지도 못하는 녹슨 쇳덩이에게 속삭이듯, 보채듯 중얼거리는 재미없는 일상이 언제까지 지속되어야 하나 싶었고, 늙은 부모가 떠나고 나면 제 몸 하나 건사 못하는 동생을 데리고 같이 늙어가며, 변변치 않은 일상을 바득바득 살아내는 것, 그런 엔딩이 지루하고 무서웠다.


그 와중에 20개월 할부로 200만 원짜리 노트북을 질러버린 것은, 나는 글쟁이였다고, 그래도 글을 쓰고 싶어서, 이것 하나는 갖고 싶었다고, 자위하는 것이었나 보다. 빌빌 거리기는 10년 가까이 된 노트북이나, 자동차나 마찬가지였지만 수천짜리 자동차는 감히 엄두를 낼 수도 없었음이다.     


글을 쓰며 살고 싶었다고 해도 사실 그리 멋들어지거나 철학적이거나, 예술적인 삶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저 남들이 그러하듯 적당히 기름지게 살고 싶었다. 때때로 여행도 다니고, 맛있는 것도 먹고, 내 소유의 집 한 채 있었으면 좋겠고(실상은 은행 것이며 내 지분은 화장실 한 칸 정도라고 해도), 그리고 볼보를 타고 싶었다.     


그동안, 뭐했냐고? 그러게 말이다. 씨발.



둘째 딸이 장애인으로 태어나기 전, 내 엄마는 길거리에서 행상을 하는 장애인을 보면 눈을 찌푸리던 사람이다. (동생과 내가 11살 차이가 나니, 열 살 이전의 비교적 뚜렷한 내 기억 속에서 엄마는 분명히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던 엄마가 장애를 가진 아이를 낳고 나서는 (어찌 보면 염치없이) 장애인과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깊은 공감과 이해를 태초부터 장착한 것처럼, 과도하리만큼 그들에게 몰입하는 모습을 볼 때가 있다. 솔직히 나는 그때마다 엄마가 하반신을 쓰지 못해 고무로 온 몸을 감싼 채 시장 바닥을 기어서 리어카를 끌고 다니던 어느 청년을 향해 찌푸리던 눈을 떠올린다. 엄마를 비난하고자 함은 아니다. 그 자리에 서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것이 있는 법이다. 내 엄마는 그저 낯선 것에 당황하고 다름에 익숙하지 않았던 보통의 사람이다. 사실은 나도 그렇다. 장애인의 가족이지 장애인은 아니지 않은가. 또한 내 동생이니 품을 뿐 만인을 품을 품은 없는 사람이다.   


자주 다니는 길목에 간간히 등장하는 폐지 줍는 노인이 있다. 도로의 한 차선을 점유하고 앞도 제대로 안 보일만큼 폐지를 실은 리어카를 끌고 유유히 걸어간다. 그러다 가끔은 도로 한가운데 리어카를 세워 두고 주저앉아 파지를 정리하거나, 짐을 다시 묶는다. 그럴 때면 사거리까지 밀린 자동차들은 그 자리에서 옴짝달싹을 못하는데, 노인은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이다. 아마도 오랜 시간 동안 무뎌진 그의 삶에 염치 따위 끼어들 자리가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과도하게 노인에게 몰입할 때가 있다. 내가 철에 맞지 않는 옷을 걸치고 굽은 허리로 파지를 줍는 상상을 한다. 마치 내게 일어날 일일 것 같은, 나는 그렇게 될 것 같은.     


오바질 일 수도 있고, 선견지명일 수도 있다. 앞날을 누가 알겠는가.    

그래서 나는 15년을 입버릇처럼 말하는 것이다. 적어도 허리가 굽기 전에, 주름이 너무 깊이 패기 전에, 고단함 앞에서 체면과 염치를 잃기 전에.    

    

이건 모조리 개소리일지도 모른다. 건강한 노년(이런 구분이 의미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을 살아내고 계실 분들에게 지독한 무례일 수도 있다. 그저 나는 언제나 그러하듯 나의 이야기를 할 뿐이니 노인세대를, 나이 든 사람들의 세상을 온통 잿빛으로 본다고 노여워하지 않으시길 바란다.     




이미 흘러간 시간이야 어쩔 수 없지만, 매일매일을 탄탄하게 살고 싶었다. 그래서 내 이야기 하나쯤 세상에 내놓고 싶었고, 할부가 30개월이 남았더라도 볼보를 타고 내달리고 싶었다. 집에 어울리는 예쁜 인테리어를 고민하고 싶었고, 다음 달에 떠날 여행에 설레고 싶었다.      


싶었고, 싶었고, 싶었다.      


이렇게 모든 것이 과거형인 것은, 어떻게든 살고 싶었는데, 그만 놓고 싶기도 해서 그렇다.


손목에 붕대를 감고, 뼈에 좋다는 영양제를 털어먹고, 그래도 가만히 있느니 보다 조금이라도 걷고 싶어서 어제는 호수를 걸었었다. 유독 예쁜 사진들을 보면서, 이제 여름이 성큼 다가왔구나 하는 마음과, 그 한편 섭섭하기도 했었다.


이제 14년 6개월이 남은 건가, 실 없이 서운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정작 오늘은 제 몸 하나 추스르기도 힘들어서 거의 기다시피 했으며, 겨우 몇 걸음을 뗄 때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통증을 이를 악물고 버텨내야 했다.     

그리고 오늘. 8720원 곱하기 4. 34880원을 벌었다.



내 글(창작물, 세상에 내보이고 싶은 글, 그걸로 돈 벌고 싶은 글)을 쓰려고 했는데, 쓰지 못하고 이렇게 맥없는 신세한탄을 쓰고 앉아있다.


그러니 이깟 노무 세상살이, 그만하고 싶은 것도 무리는 아니지 않을까.     




그래도 15년은 남았네... 하고 싶다. 아직은.. 15년은 더 살고 싶다.




같은 풍경들이 유독 이쁜 날이, 그런 날이 한 번쯤은 있다.

그러니까 아직 15년은 더 살고 싶어도 괜찮지 않은가. 



                                                   


간혹 댓글을 막아둡니다. 별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요.

어딘가에 (특히나 익명성이 보장되는 곳에) 굉장히 솔직하게 쏟아내고 싶은데, 솔직히 소통할 기운은 없고, 따뜻한 위로의 말씀조차 제 마음 안에서 무거워질 때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이기적인 마음입니다. 어쩝니까, 저는 한낱 사람인 걸요. 


그럼에도 들러주시고, 읽어주신 분들께 진심을 담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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