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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jak Nov 05. 2021

병원 복도에서.

엄마가 허리 수술을 했다. 코로나 상황의 병원 방침 때문에 보호자는 일단 병원에 들어오면 나갈 수 없는 반감금 상태인 사정으로 내일 아침까지 오갈 데 없는 처지라서 병원 복도 한쪽 휴게실에 앉아 노트북을 펼쳤다. 수술실 앞에서 기다리는 동안 긴장을 눌러볼 셈으로 다운로드한 영화라도 보겠노라 들고 온 노트북이지만 당연히 그때는 열어보지도 못했다. 밤이 되니 엄마도 안정이 되었는지 잠이 들었는데 나는 할 일도 딱히 없고 잠자리가 불편해 잠도 안 오고.. 결국  노트북을 열어 앞뒤 없는 글을 시작하는 중이다.         


 



엄마는 늘 허리가 아프다고 했다. 그때마다 진통제를 먹고, 물리치료를 다니면서 버텼다. 그러다가 좀 견딜만해지면 늘 하던 대로 버스비를 아끼겠다고 걸어서 시장을 다녀오고, 수건은 무조건 삶아야 한다면서 가스불에 양동이를 올려놓고 빨래를 삶았다. 다 삶은 빨래를 들고 오종종 베란다까지 걸어가 세탁기에 빨래를 쏟아부었다. 철푸덕, 수건이 세탁기 안으로 떨어지면 엄마는 그제야 ‘으그그’ 하며 허리를 폈다.     


그렇게 마구잡이(그렇다. 마구잡이)로 버티더니, 한계치에 다다랐는지 어느 날부터는 다리까지 통증이 심해진다며 절뚝거렸다. 나 역시 근래 허리 통증으로 애를 먹다가 최후의 보루로 (사릴 진짜 싫지만) 신경외과에서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고 조금 견딜 수 있을 만큼은 되었던 터라 나는 내가 갔던 병원을 콕 집어서 엄마도 거기 가서 주사 한 방(?) 맞고 오라고 엄마의 등을 떠민것이다.     


오비이락일까? 아니면 설상가상일까? 그날로 엄마는 통증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결국 다른 병원에서 검사를 했는데 긴급한 수술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엄마는 수술이 싫다며 일주일을 더 버텼다. 나도 엄마의 수술이 싫었다.     


솔직히 말하면, 수술실 앞 복도에 앉아 엄마의 귀환을 기다리는 그 시간이 싫었다. 무서웠다. 마취도 무서웠고, 오만가지 일어날 수 있는(그러나 사실 일어나지 않을 확률이 더 높은) 상황들이 두렵고 무서웠다. 유혈이 낭자하고, 기계의 수치가 널을 뛰면서 삐삐삐 울리는 그런 것들.    

  

지난여름, 아빠가 떠난 뒤라서 더욱 그랬다.      


그리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동생을 혼자 둘 수 없어서 부랴부랴 집으로 달려가야 하는 것, 오롯이 어깨로 내려앉는 그 짐, 그 무게, 답답하게 가슴을 조여 오는 그 모든 일어날(?) 상황들이 무서웠고, 싫었다.  


그래서 엄마의 수술을 만류했을 것이다. 허리는 손대는 게 아니래. 라면서.


한편으로는 그 병원을 보내서 주사를 맞게 한 나를 자책했다. 주사가 악화시킨 건가? 내 탓인가?




입원 후 약물치료로 일주일을 버틴 엄마는 끝내 수술은 싫다면서 처음보다 통증이 좀 줄었으니 수술 대신 시술로 통증이라도 잡아보자고 했다. 코로나 때문에 검사를 받아야 면회가 가능하다는 병원의 규정과 동생 문제 외 기타 등등의 사정으로 입원 이후 일주일 동안 면회를 하지 못한 나는 전화 통화로 통증이 줄어들었다는 엄마의 말만 믿고 시술 예약을 위해 병원을 찾았었다. 그러나 엄마의 상태는 상상 이상으로 나빴다. 통증은 여전한 데다 제대로 걸음조차 못 떼는 것이다. 그런데도 엄마와 나는 어떻게든 할 수만 있다면 시술을 받아볼 요량으로 이리저리 방법을 찾았다. 마취를 하지 않는 시술이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의사가 시술에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며 계속 수술을 권하는 건 돈 때문이라고 단정지었다. 그러나 곧 서로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엄마 입에서 '수술할까?'라는 말이 나왔다. 이 정도면 우리 엄마, 정말 아픈 것이다. 이건,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수술 예약을 하고 돌아와 친구와 전화 통화로 1시간을 떠들었다. 주로 엄마에 대한 험담이었다. 왜 그렇게 공공근로며, 청소일이며 늙어서까지 일을 하느라 억척이었을까? 운동이라는 핑계로 버스비 아끼자며 한 시간씩 걸어 다닐까? 왜 수건이며 속옷을 삶아 대느라 그 무거운 양동이를 들고 다니는 걸까? 왜 도대체 정체불명의 진통제로 통증만 누르고 미련을 떤 거야? 그러더니 평생 모은 쌈짓돈을 병원에 탈탈 털어주게 생겼잖아? 하면서. 속상함이 없진 않았다. 위에 나열한 많은 것들 중에서 일정 부분은 내가 좀 '형편이 괜찮은' 딸이었으면 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으니.      


그리고 마지막에 말했다.     

 

"나 사실 무서웠다. 그래서 얼른 수술하라고 못했어. 근데 이건 무서워해야 할 일이 아니라, 그냥 해야 하는 일이잖아. 수술을 해야 하는 상태면 수술을 결정해야지, 안 될 시술을 해보자고 이리저리 고민할 일이 아니지."

      

바로 수술을 결정했더라면 일주일의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지는 않았겠지만, 그건 결과론적인 이야기일 뿐, 모든 것에는 지불해야 할 비용이라는 것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것이 정말로 돈이든, 상황을 제대로 마주하기 위한 시간이든.




약 세 시간이 더 걸린 수술 시간 동안, 나는 수술실 앞 복도에서 석상처럼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마취가 덜 깬 엄마가 아이고 아파, 아이고 아파. 를 랩처럼 쏟아내며 허리가 끊어진다고, 나 죽는다고 소리를 질러댈 때 ‘아냐, 엄마 허리는 잘 붙어있고, 엄마는 안 죽고 잘 살아있어.’라며 흰소리를 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마취가 덜 깨서 평소보다 백배쯤 호들갑스러운 말투로 ‘아파’를 반복하는 엄마를 두고 나 하루 종일 굶어서 배고프니까 샌드위치 좀 사 먹고 오겠다는 비정한 딸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내가 샌드위치 타령을 할 때 옆 침대의 환자가 조금 뜨악한 표정으로 나를 흘깃 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보다 나중에 수술실에 들어가 1시간쯤 먼저 나온 정형외과 환자였다. 수술 환자는 집중치료실인가 뭔가에서 일단 하루를 지켜본다고 하니, 그 분과 엄마가 나란히 한 병실에 누운 것이다,     


‘췌! 할머니! 마취 중이라 모르셨겠지만 할머니의 따님은 의사가 나와서 보호자 찾을 때는 밥  먹으러 가고 없었고, 할머니가 나오던 순간에는 통화하느라 없었어요. 나중에 와서 나한테 혹시 수술실에서 누구 나왔냐고 물었거든요, 그리고 사실 나는 할머니 딸이 참 부러웠어요. 당연히 별일 없을 것이라는 그 믿음의 여유가요.’


         



요 근래 유독 많은 것들을 고민하고, 해결하고, 결정해야 했다. 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를, 누군가에게는 분명한 태도를 보여야 했다. 지금 하는 결정이 나의 가치를 후려치는 중인가, 혹은 반대로 과대평가를 하는 것인가를 냉정히 들여다보아야 했다.


두통약을 털어먹어도 가시지 않는 두통을 달고 살았고, 문득 이만하면 그만 살아도 되겠다는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무서워서 피하려 했던 것들은 결국 어느 때곤 마주해야 할 일이었으며, 그것은 생각보다 별것 아니었음을 ‘또’ 알게 되었다. 몸에 밴 습관이 그렇게 쉽게 떨쳐지는 것이 아니다.내게 두려움은 그런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반복하면서 한 칸씩 성장하는 것이 또 사람이 아니겠는가.


지금은,  내가 살아있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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