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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jak Feb 19. 2022

지구는 나를 중심으로 돈다.

좋아하는 것을 말하고, 좋아하는 것을 품는다.

예전에 누군가와 밥을 먹는 데 '뭐 먹을래요?'라고 하기에 ‘아무거나요.’라고 대답했다. 지금도 그렇고 그때도 그렇고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대답이다. 그 음식점에서 파는 음식 중에서 특별히 가리는 음식이 없었으니 나름 상대에게 결정권을 주기 위한 배려였을 것이다. 그런데 상대는 다시 한번 나에게 메뉴판을 건네면서 말을 더했다.     


“최작가님, 아무거나라고 하지 말고 본인이 좋아하는 음식을 골라요. 딱히 없거든 메뉴판에 있는 음식 중에서 그냥 하나 골라서 콕 집어서 말해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내가 말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은 챙겨주지 않아요. 그리고 늘 아무거나 라고 하는 사람은 그냥 '아무거나'가 돼요.”     


그래서 내가 결국 무슨 메뉴를 골랐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그날의 경험이 마음에 닿은 것은 사실이다. 어찌 보면 그분이 지나치게 까칠하거나 자기중심적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런데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말하는 그 가벼운 일 정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그러나 나는 그 이후로도 습관적으로 ‘아무거나’라고 말했다. 나름의 배려거나 몸에 밴 ‘빌어먹을 착함병’ 이거나. 단지 싫어하는 것을 참지는 않았다.     


“저는 익은 생선은 싫어해요.”     


그러고 보니 싫어하는 것들은 많이, 분명히 말했다.     


“물렁한 과일 싫어해요.”

“움직이는 것 싫어해요.”

“커피에 시럽 넣는 것 싫어해요.”

“뜨거운 음식 잘 못 먹어요.”

“산 싫어해요.”

“1m도 걷기 싫어요.”

“추운 거 싫어요.”

“더운 것도 싫어요.”          


문득 나는 ‘부정’에만 익숙해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싫다.’ ‘하지 않는다.’ ‘안 된다.’ 

새로운 결심을 하거나 계획을 세울 때도 그랬다.


'게으름 피우지 않는다.' '미루지 않는다.' '과식하지 않는다.' '늦잠 자지 않는다.' 등.


어디선가 읽었는데 인간의 뇌는 ‘부정’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다. 실패를 생각하지 말라는 말을 꺼내는 순간 뇌가 인식한 것은 ‘실패’라는 단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지 않는다.’ ‘ 않는다.’ ‘싫다.’ 대신 ‘한다.’ ‘좋다.’ ‘그렇다.’ 등의 긍정어를 쓰라는 것이다.     


나는 이 이론이 맞는 것인지, 명확한 근거가 있는 것인지를 확인할 깜은 없다. 다만 얼핏 생각해도 부정어로 부정적인 대상을 강조하는 것보다는 긍정어로 긍정할 거리들을 한번 더 입에 올리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정’에 익숙해진 나를 바꿀 필요가 있어 보였다.


속된 말로 ‘애끼다 똥 된다.’라는 말이 있다. 여러 가지 상황에 두루 적용되는 말인데, 가까운 것으로는 좋은 과일과 조금 시들한 과일을 두고 시들한 것들부터 먹다 보면 나중에는 결국 전부 시들한 것들만 남는다거나, 어차피 죽어 썩어질 몸, 아끼지 말고 마음껏 이 사람 저 사람 만나 연애나 하라는 말까지(근데 이건 혼자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 적용 사례는 많다.     


가까이 내 부모님이 그랬다.     


엄마는 미련하리만큼 아끼고 아끼면서 병원비, 택시비도 아까워 아픈 다리를 끌고 걸어 다니고, 치료도 미뤘지만 결국 망가진 허리 수술비로 비상금 전액을 다 털어 넣었고, 아빠는 생전에 삶의 즐거움을 배운 적이 없는 사람처럼 오직 술에서만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 끝내 여기저기 망가진 몸으로 애달프게 세상을 떠났다. (언젠가 한번 흘려가는 말처럼 여기저기 운전해서 여행을 하겠다더니 정작 평생을 버스기사로, 트럭기사로 살아놓고 본인을 위한 운전은 하지 못했다.)           


그럼 나는 어떤가? 꿈을 따라왔다고는 하지만 이도 저도 아닌 세월이 더 길었으며, 늘 쪼들리는 경제 상황, 제 뜻대로 되지 않는 것들 앞에서 희망보다는 절망을 입에 올렸고, 귀한 것들을 흘려보냈다. 나의 경우는 아끼다 똥 된 것이라기보다는 귀한 줄 모르고 방치한 탓이 크겠다.


     



좋아하는 것들을 입에 올려보았다.

내가 뭘 좋아하지?     


노을 무렵의 하늘, 새콤달콤한 과일, 산미가 적은 진한 커피, 투박하고 묵직한 머그잔, 탁 트인 바다, 바람 냄새, 회, 초밥, 쫄면, 날씬한 몸, 낯선 여행지에서 걷는 조용한 골목길, 좋은 사람과의 스킨십, 새 책 냄새, 진하지 않은 향수, 가죽 소품, 로즈골드색, 붉은 립스틱, 볼보, 깨끗한 이불 냄새. 소고기, 돼지고기, 남이 타 준 커피, 말이 통하는 사람, 예쁜 여자, 잘생긴 남자, 타이핑 소리, 빗소리, 눈 오는 풍경, 튜브 타고 바다에 떠 있기, 휴일 아침, 입금, 문 앞에 놓인 택배, 하이힐, 날카롭게 떨어지는 타이트한 원피스, 짧은 반바지, 혼자 있는 시간, 함께 하는 시간, 적당한 소음, 침묵, 통통한 아기 볼, 고양이, 강아지, 후추, 바닐라 아이스크림, 자몽에이드, 공항, 새로 산 물건들, 오랜만에 간 서울 밤거리, 맥주, 치킨, 소주, 브런치 파란 점, 친구가 보낸 카톡 선물, 귀걸이, 맨발로 밟는 바닷가 모래, 원고 끝에 찍히는 ‘ending’.     


어떤 것들은 당장이라도 품을 수 있는 것들이고, 당장은 좀 어려운 것들, 좋아는 하지만 아직 갖지 못한 것도 있다. 볼보 같은 것. (되게 갖고 싶다. 볼보.)     



좋아하는 것이라고 쓰기 시작했는데 그것들은 결국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이다. 지속시간이 1분이 채 안 되는 경우도 있고 오랜 시간 마음에 남는 것들도 있다. 


나는 늘 행복해 본 적이 별로 없다고 말했다. 사실 행복한 기억이 별로 없기도 했고, 힘든 날이 더 진한 기억을 남기는 이유였을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바라보니 내가 바라는 행복은 욕망이었나 보다. 지속적인 행복, 부족함 없는 행복을 찾아내려니 매 순간의 짧은 행복은 잊은 것이다.            


나는 요즘 배가 부르면 힘들다. 급격하게 살이 찐 이후로 몸을 굽히면 뱃살 때문에 숨이 차는 것이다. 그러니 조금만 과식해도 기존의 뱃살에 새로운 포만감이 더해져 그렇게 힘들 수가 없다. 그리고 식후에는 너무 졸려서 책도 못 보고 글도 쓸 수가 없었다. 그리고 경제 상황이 넉넉하지 않다 보니 식비도 부담스러울 때가 많은데 웃기게도 그 처지가 서러워서인지 한동안 배달앱이 쉴 틈이 없었다. 어마어마한 엥겔지수 같으니라고.    

 

그래서 마음을 고쳐먹었다. 식비도 부담이고 많이 먹으면 몸이 힘들고 졸려서 일도 못하니 먹는 양을 줄이되 가끔 좋아하는 것들만 골라 먹기로 했다. 지금 몸 상태로 봤을 때 살은 반드시 빼야 하는 처지이다 보니 겸사겸사 다이어트도 할 겸. 

(배달 떡볶이 다섯 번을 줄이면 광어회가 한 접시다. ^^  )

   

매우 사소한 일이다. 그리고 어찌 보면 청승맞을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다 갖고 싶지만 당장 다 가질 수 없다. 혹은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것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씩 집중하고 하나씩 품어볼 것이다.




매일 창문만 열면 만날 수 있거나, 당장이라도 할 수 있는 것들, 언젠가 만났던 것들, 그리고 다시 만날 수 있는 것들.




지구는 나를 중심으로 돈다.

나는 그렇게 믿기로 했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든, 오만가지 우주가 펼쳐지든 말든 나의 세상과 나의 우주에서 나는 내가 좋은 것들을 하나씩 가져가야겠다. 행복을 잊고 살았던 사람이 조금 행복해지려고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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