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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jak Mar 02. 2022

봄, 정신 줄을 놓으면 목숨줄이 위태롭다.

    

얼마 전, 알바 중인 사무실 직원분의 따님이 결혼을 했다. 축의금을 준비해서 봉투를 드렸는데 바로 뭔가 쌔-한 기분이 들었다. 아침에 차 안에서 봉투를 챙겼는데 혹시 봉투만 챙기고 돈을 안 넣은 것은 아닌가 하는 이상한 느낌. 그럴 리 없다 생각하면서도 왠지 한번 확인을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내가 실수한 것이 아닌 것이라는 확신이 필요했다. 지갑을 차에 두고 온 터라 다시 차에 가서 확인을 했다. 이런 젠장. 축의금으로 준비한 돈이 그대로 있다. 그 길로 호다닥 튀어와 양해를 구하고 죄송하다고 했는데, 괜찮다면서 웃으신다. 얼른 봉투를 다시 받아 제대로 챙겨 넣어서 다시 드리고 왔는데..     


잠시 후, 그분이 오셔서 내게 5000원을 주고 가셨다.     

내가 빈봉투도 아니고 5000원을 넣어서 드린 것이다. 봉투를 열어본 상대는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다. 지금 이게 뭐지? 잘못 넣은 거겠지? 혹시 나를 놀리나? 형편이 정말 어렵나?.... 등등 오만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그저 정신줄을 살짝 놓아서 그렇습니다.      


이 얘기를 집에 와서 했더니 엄마가 그런다. 예전에 네 아빠가 친구 장인상에 가서 빈봉투를 넣고 왔다고. 친구분이 다시 연락해서 혹시 뭐 착각한 거 아니냐고 물어봐서 얼른 가서 수습했다고 한다.


이것도 유전인가?     


솔직히 나는 곧 그만둘 회사의 직원분 자제 결혼식까지 챙길 만큼 마음 품이 넓은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지난여름, 내가 어른이 되어 겪을 일 중 하나를 겪었을 때 평소 친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그분들은 당연하다는 듯 마음을 전해주었다. 기회가 된다면 갚고 싶었는데 이렇게라도 챙길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좋은 일이라 마음이 편했다. 비록 코미디가 되고 말았지만.     


엄마가 여기저기 결혼식에 부지런히 축의금을 내고 다닐 때, 받지도 못할 축의금은 뭐하러 그렇게 내고 다니냐 타박했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하나, 둘 알게 된 것들이 있는데 세상사 칼 같은 계산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더라는 것이다.


일상에 깃든 마음이 때론 논리의 영역을 벗어나서 설명할 길 없는 자욱을 남기며 나의 살아온 걸음에 조금씩 쌓여있었다. 





지난 금요일, 3차 백신을 맞았다. 1, 2차 모두 별 증상 없이 넘어갔었으니 이번에도 그러리라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두통과 무기력과 어지럼증으로 주말 내내 고생했는데, 월요일 출근 때까지도 어지러움이 가시질 않아 꽤나 힘들었다. 반쯤 졸다시피 하다 퇴근을 했는데 집에 거의 다 와서는 엉뚱한 짓을 해버렸다. 직진 후 좌회전 신호에 서 있다가 아무 의심 없이 직진신호에 좌회전을 한 것이다. 이 길을 하루 이틀 다닌 것도 아닌데.      

게다가 나는 내가 뭘 잘못했는지도 몰랐고, 내가 좌회전을 할 때 코 앞까지 다가온  반대 차선 차들을 향해 ‘왜 그러는 거야?’ ‘왜 와?’ 이러고 있었다. 그 와중에 빨리 지나간 것도 아니고, 세월아, 네월아 새로 올라가는 건물에 옷가게가 생겼네? 하면서 유유히 좌회전을 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나 방금 일 낼 뻔했구나. 반대편 차선에서 누군가 속도를 올려서 치고 나왔다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일이었다. 신호위반인 내가 백퍼 잘못한 일이다. 그런데 정말 몰랐다. 늘 알던 것들을 까맣게 잊어버린 채 엉뚱한 길로 흘러간 것이다.   

정신줄을 놓다가 목숨줄도 놓을 판이다.     



여기서 직진신호에 용감하게 좌회전.  (사진 출처: 다음 로드뷰)



왜 이러냐?




2월 한 달 동안 뭘 했는지가 기억이 나질 않았다. 해야 할 일이 분명히 있었는데 뭘 하느라 놓쳤는지도 모르게 놓쳐버렸고 비현실처럼 3월이 되어 있었다. 블랙아웃인 것 같다. 정신을 차려보니 왜 와 있는지도 모를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서 있는 기분이다. 


백신 후유증인지 어지럼증은 아직 가시지 않았고 이명도 심해졌다. 원래 종종 이명이 올라오는터라 꼭 백신 때문이라 하기는 어렵겠지만, 일상생활 중에도 의식될 정도로 시끄럽게 들리는 이명은 정말 오랜만이라 덜컥 겁이 난다. 한번 시작하면 지독하게 괴롭히다가 사라지는 것이 이놈의 이명이라.     


몸 상태가 이렇거나, 마음 상태가 저렇거나. 

내 상태가 어떤지를 명확히 인지하고 그럴수록 정신줄을 단단히 점검해야 했다. 얼핏 긴장을 놓으면 예상보다 훨씬 큰 대미지를 입을 수도 있는 일이다. 사는 것은 별일 아닌 것 같다가도 별일이기도 하니까. 


축의금 봉투에 5000원을 넣는 일은 자다가 이불 킥하며 웃을 일이지만, 직진 신호에 좌회전을 해 버리는 일은 그 사소한 행위 대비 엄청난 사고가 날 수도 있는 일이다. 긴장 없이 산다는 것은 이토록 위험한 것이다.






겨울이 채 걷히지 않은 듯 호수의 얼음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바람의 냄새가 달라졌고, 저 멀리부터 서서히 녹아들어 오는 호수는 봄을 말하고 있다. 어느새 봄이다. 곧 꽃이 필 것이고, 또 눈이 올 것이다. 그리고 어쨌든 별일이 없는 한, 나는 살아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글을 쓰는 내내 어지럽다. 3차 백신은 만만한 것이 아니다.

이상증세가 있으면 병원에 오랬는데 어지럽다고 한들 그냥 자라고 할 것 아닌가. 


사는 것, 정말 어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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