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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jak Feb 20. 2023

뜻대로 되지 않았어도, 뜻대로 살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수를 했다.     


어쩌구 저쩌구 한 사정으로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했었지만, 적성에 전혀 맞지 않았다.

사는 동안, 그때의 선택을 꽤 많이 후회했다. 


중학교 때 성적은 좋은 편이었다. 비평준화 지역 인문계 여고에 들어 가도고 남을 성적이었으니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16살 아이가 느꼈던 과도한 삶의 무게와, 수학이 싫다는 단순한 생각, 그리고 살아가는 동안 만나게 될 몇 번의 선택지와 그 선택에 따라 마주할 삶의 가능성은 때때로 많이 냉정하다는 것을 알려줄 어른이 없었던 시골아이의 어린 고집이 핸들을 꺾었다. 

얼른 졸업해서 얼른 돈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집도 가난하고, 몸이 불편한 동생도 있고, 가난의 대물림이 싫어서 그랬는데......(어, 지금 이 가난은 뭐지??)     


적성에도 맞지 않는 학교에서, 흥미도 없는 과목들을 공부하려다 보니 성적은 바닥으로 내리꽂혔고  평생 받아보지 못했던 성적표를 받아들고, 인문계 친구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내신성적을 등에 업고 (당시 실업계 고등학교에서 대학에 진학한다고 하면 ‘내신이 좋았구나?’ 라고 물어보던 시절이었다.) 뒤늦게 대입에 뛰어들었다.

3년 동안 교과서 구경도 못해 본 과목까지 혼자 공부해야 했다. 

(실업계 고등학교 교과과정에는 대입 시험을 보는 일부 과목이 빠져있다.)          


원래는 재수학원을 등록하려고 했는데, 같이 가기로 한 친구가 바람을 맞혔다. 핸드폰도 없던 시절에 약속장소에서 무려 두 시간을 기다렸는데, 끝내 이 친구는 나타나지 않았고 그 친구 낯짝이 보기 싫어서 재수학원 대신 독서실로 간 것이다.

(친구는 다음날 혼자 와서 등록을 했다고 당시 그 학원 사무실에서 직원으로 근무하던 다른 친구가 나중에 알려주었다)

그때부터 모든 연락을 끊고, 일주일 내내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길을 걸어 독서실을 다녔다.      

그리고 지방국립대에 합격했다.     


그런데 사실 나는 그 학교에 가지 못할 뻔 했다. 성적이 모자라서도 아니고, 등록금이 없어서도 아니다.      

면접 예비 소집일, 장소가 바뀐 것을 모르고 얼타고 있다가 짜증이 나서 그냥 돌아오려고 했다. 그 때 그저  심심하다고 나를 따라왔던 친구가 ‘이 미친*이 뭐라는 거야! 저쪽 가서 물어봐!’ 하고 내 등을 떠밀었고, 무사히 바뀐 장소를 알아내서 참석할 수 있었다. 기억이 정확하지 않지만 당시 예비소집 불참시에는 탈락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런 황당한 행동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내게 간절함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내가 생각보다 성적이 좋았던 것을 몰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그 학교에 합격하지 못할 줄 알았으니 별로 간절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학교에 들어갔고, 4년 내내 열심히 놀았다. 

IMF 끝자락이었으니 경기는 바닥을 쳤고 취업문은 좁았다. 게다가 나는 흔한 영어성적, 자격증 하나 없으며 학점도 시원찮은 루저였다. 

꼴에 실패했다고 하기는 싫었으니 핑계와 희망이 뒤엉킨 길을 찾았다.     

글 쓰는 사람.     

......그리고 오늘까지 왔다.           




설 연휴,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기로 했었는데 친구 아이가 아픈 바람에 만나지 못했고, 일주일 미룬 약속은 내가 코로나 확진이 돼 버리는 통에 만나지를 못했다.

자가격리로 집안에 틀어박혀 있는데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문 앞에 뭐 하나 두고 갈테니 가지고 들어가라고 한다.  만나면 주려고 설 선물을 샀는데, 더 미루면 추석 선물이 될 것 같아서 두고 간다고, 엄마 드리라면서 홍삼세트를 놓고 갔다.           


아이고, 이 인간은 나를 20년을 돌보네.


친구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 바로 직장인이 되었고, 철없는 대학생, 지독하게 까칠한 작가 지망생, 잠깐 직장인, 그리고 다시 돈 못버는 무명작가로 사는 대책없는 친구년을 매번 밥 사먹이고, 술 사먹이고, 홍삼 먹이면서 응원해준다.     


“야, 너는 혼자 알아서 대학도 가고, 남들은 할 생각조차 못하는 글도 쓰잖아. 상도 받았고. 이제 대박만 나면 돼. 대박 나서 집도 사고, 니가 좋아하는 볼보도 사. 그리고 나 샤넬백 하나 사줘라.”     


이 친구의 큰 아이가 올해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됐다. 

고등학교 선택을 두고 애가 친구랑 같은 학교 가겠다고 고집을 피운다기에 감히 조언이랄 것은 없지만 모든 선택에는 다양한 결과가 뒤따르는 것인데, 하나의 선택에 따라서 가능성은 무수히 많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사실 예전 내 선택에 후회했고, 때로는 냉정한 시선으로 삶의 다양한 가능성을 알려줄 어른이 없었던 것이 내내 아팠다고. (그럼에도 삶은 내가 사는 것이지만, 조력자는 소중하다.)    


그 아이 생각이 나서 문화상품권을 몇 장 샀다. 

예쁜 봉투에 넣어주면 좋겠다 싶어서 차안을 뒤적였더니 마침 빈 봉투가 보였다. 봉투에 상품권을 넣고 친구의 직장에 잠깐 들렀다. 봉투를 전해주고, 고등학교 입학을 축하한다고 했다.

키우느라 고생했다는 말도 덧붙여서.     

그렇게 훈훈하게 끝나는 줄 알았는데....?              


                


응???


엄마는 절에 가서 내 이름으로 초를 밝혔다.

도대체 봄날이 찾아오지 않는 늙어가는 딸년이 잘 되길 바라면서 정성을 들이고, 절엑서 받아온 실뭉치를  봉투에 넣어 차 안에 두라고 준 것이다.


나는 까맣게 잊고 빈봉투려니 하고 친구에게 준 것인데, 그게 저렇게 돌아온 것이다.      

    



매순간, 뜻대로 되지 않았으나 결국 뜻대로 살았다.

뜻하지 않게 나를 바람맞힌 친구가, 미친년이라며 등짝을 밀었던 친구가, 수십년의 세월을 꾸준히 응원해주는 친구가, 그리고 늘 애끓는 엄마가, 그리고 다 옮기지 못한 많은 인연과 시간들이 뜻대로 살게 길을 터 준 것이다.  


그 길 위에서 나는 멀뚱멀뚱 서 있었다. 무서워서, 몰라서, 힘든게 싫어서, 실패하면 끝일까봐 뒷걸음질쳤다.

그리고 차갑게 돌아본다. 어떤 순간에 아쉬움은 있을지언정 모든 순간은 결국 내 몫이었다.



잠시 오만가지 핑계를 끌어오며 나를 딱히 여겼다.

이제 오만가지 이유를 찾아내어 나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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