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전직 대통령은 본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마자 선거에서 당선된 사람의 신분을 칭하는 '당선자'의 어감이 좋지 않다며 ‘당선인’으로 바꿨다.
자(者)는 어떤 대상을 지칭하는 한자어이므로 당선인이나 당선자가 그것이 그것일진데 ‘놈’ 이라는 우리말 뜻풀이가 불편했나보다.
이를테면, 도둑놈 이라거나.
그렇듯 같은 의미를 갖더라도 일상에서 ~인 보다는 ~자라고 칭할 때는 약간의 멸시를 품은 경우가 있다. 대표적인 예가 ‘장애자’ 이다.
실질적인 뜻이 무엇이었든 간에 장애인을 칭할 때 굳이 ‘장애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좋은 뜻으로 그렇게 부르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대부분이 은연중에 자신보다 아래계급의 사람으로 인식하는 경우 그런 호칭이 나온다.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빈도가 높았고, 어리거나 젊은 연령대에는 ‘애자냐?’ 라는 식으로 비하의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병신같다’ 는 거의 관용어처럼 쓰인다. 심지어 공공기관의 축제 행사 프로그램에 ‘병맛 경진대회’를 쓰려한 경우도 있었다. 일부의 사례지만 ‘애자새끼’ 라는 표현도 심심찮게 쓰이니 장애인에 대한 '일단' 먹고 들어가는 멸시와 비하는 하루 이틀의 얘기가 아니다.
“정신지체 장애자 애들이 넷씩이나 와서 신발을 네 개나 사갔잖아? 어휴~ 카드 다 만들어줘서 그런거로 쓰는거야. 나라에서 다 해주잖아. 다 우리 세금인데!”
나는 시장통을 가로질러 가는 중이었다.
신발가게 주인 여자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있는 노점상 할머니에게 목청을 높이는 중이다. 진저리가 난다는 듯 팔을 휘휘 저으며 파리채로 파리를 쫓는다.
'정신지제 장애자' 가 아니라 '지적장애인'으로 표현해야 하지만, 그런것을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이 저런 표현을 쓸리 없으니 그건 그렇다 치고.
아니, 도대체 뭐가 문제지? 신발을 공짜로 달란 것도 아니고, 자신이 팔고 있는 물건을 정당한 비용을 내고 사 갔는데 그 대상이 ‘장애자’ 여서 불편하고 아깝다는 것인가?
그곳은 시장통 신발가게다. 구찌 짝퉁, 버버리 짝퉁, 아디다스 짝퉁 삼선슬리퍼 등 정작 파는 본인도 모를 온갖 짝퉁이 진열된 싸구려 신발가게.
고작 그따위 싸구려 신발 하나 사 신는게 뭐가 문제인가?
지금 나의 표현이 거칠다. 옳지 않다.
나도 그들의 사고 방식을 따라해 봤다.
그 말을 듣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걸음을 돌려 신발가게로 갔다.
“아주머니, 사람들 많이 지나다니는 길에서 말 좀 가려서 하시면 어때요?”
“예, 뭐?”
“제가 가족 중에 장애인이 있어서 듣기에 많이 불편한데, 신발 가게에서 신발 사 신는게 뭐가 문제라고 그렇게 험담을 하십니까? 다들 각자 돈으로 쓰는 거지 아주머니 돈으로 쓰는 거 아니에요.”
“나, 세금 많이 내!”
“세금은 다 내요. 그 세금 여기저기에 다 같이 쓰는 거지 장애인만 쓰는것도 아니구요.”
“근데 식구 누가 장애인인데요?”
“동생이요.”
“아......남동생, 여동생?”
“그게 중요해요? 그리고 속으로 생각하는 건 자유지만, 그렇게 큰소리로 함부로 말씀하시는 건 아니죠.”
“아....알았어. 말 안할게.”
아주머니는 적잖이 당황한 듯 했다.
모두가 동조하리라는 생각이었나보다. 감히 ‘장애자’ 주제에 우리가 내는 세금으로 펑펑 쓰고 다닌다고 ‘일침’을 가하는 중이었을 것이다.
세금을 내면 얼마나 내는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저런 말을 하는 상인들은 최종소비자가 내는 부가세도 자기가 내는 줄 아는 경우가 많다. 즉, 오늘 판매한 신발 네 켤레에 포함된, 본인이 맘껏 비하하고 떠든 그 ‘정신지체 장애자’ 들이 물건 구매와 동시에 낸 세금이다. 이걸 이해할 상식이 있다면 내 물건을 사간 고객을 ‘내가 내는 돈’으로 빌어먹는 존재로 인식하는 오류를 범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세금을 많이 낸다고 해서 누군가를 멸시할 자격이 있는가?
장애를 가진 이들을 사회적 약자라 칭한다. 현대 문명사회에서 이들은 보호의 대상이다. 스스로 살아갈 능력이 떨어지니 사회 공동체의 역할분담이 필요한 것이다. 노인도 그렇고, 아이도 그렇다.
(그리고 이들이 모두 현금지원을 받는 것도 아니다. 지원대상과 지원 방법은 다양하다.)
일정 소득과 자산 이하의 노인은 기초연금을 받는다. 이곳은 지방 소도시이므로 일단 부동산 가격이 낮다. 그로 인해 자산 기준의 허들이 낮아 대상자가 많은 편이다.
그 시장 상인이 핏대를 세우며 떠드는 말을 듣고 있는 노점상 할머니도 높은 확률로 기초연금을 받고 있을 것이다. 그것도 세금이다. 세금으로 복지혜택을 받는 이들을 욕하는 패기가 왜 ‘장애자’ 한정인가?
속된 말로 병신이라서? ‘예쁘지 않아’ 서? 그렇게 태어나거나 그렇게 된 걸 어쩌겠는가? 뭐 ‘살처분’이라도 하나? 그것을 품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 선진국가이다.
오래전 학생 무상급식을 두고 서울시장직을 걸었던 정치인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찬반투표가 부결되면서 약속대로 시장직을 내려놓았는데, 그때 내세운 논리가 ‘왜 부자 아이들 밥값을 국민 세금으로 내냐. 포퓰리즘이다!’ 였다. 아마 부결될지 몰랐던 것인지도. 그들의 사고방식이라면 가난한 아이들은 꼬리표를 달고 티가 나야 했고, 자신들이 ‘특별히’ 받는 혜택에 감사해야 할텐데 어디 감히 감사도 모르고 묻어가는가? 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배배 꼬여서’ 짐작할 뿐이다.
내 지인 중에 한 명도 그런 논리로 무상급식을 반대했었다.
‘내 세금으로 왜 이재용 아들 밥을 먹이냐?’ 라며 핏대를 높였다.
그래서 나는.
“이재용 아들 밥은 이재용이 먹여. 그리고 아마 이재용 아들은 사립이라 무상급식 안 할거야.니가 내는 세금이라고 해 봐야, 니가 매일 다니는 도로 유지비에도 못 미칠거다.”
라고 했다.
돈이 지상최대의 가치가 된 지 오랜 세상이다.
물론 돈은 많을수록 좋다. 나도 돈 많이 갖고 싶다.
그러나 염치는 알아야 하지 않는가.
모두가 불편하지 않도록, 누군가의 빈 곳을 티나지 않게 채워주는 것이 그렇게 배가 아플까?
내가 버는 돈은 좋은 돈이고 복지에 쓰는 돈은 눈먼 돈인가? ‘감히’ 신발 하나 사 신었다고 욕을 먹을 일인가?
작년의 집중호우로 서울시 반지하 세대의 많은 수가 피해를 입었다. 올해도 비가 많이 올 것이라는 예측이 많다. 이에 대한 서울시의 대책이 참으로 놀랍다.
“음.....그런 경우에 ‘주인집’으로 피난을...”
낮은 곳에 사는 이들은 높은 곳에 사는 ‘주인’에게 도움을 청하라.
솔직히 말하건데, 참으로 천박하다.
장애인이냐, 장애자냐, 장애우냐. 여러 번 말했지만 중요하지 않다.
각자에게는 이름이 있고, 각자의 삶이 있다.
어떤 세상이나 더 가진 이와 덜 가진 이가 있다.
가능하면 간극을 좁히는 것이 복지이고, 그것이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렇게 자율경쟁 좋아하시면, 국가부터 해체하고 사업가를 고용하면 될 일 아닌가.
지금 이 국가의 수장과 리더들은 그 지위와 존중, 예우를 받는 만큼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
입만 열면 자유자유 하면서 경쟁경쟁 노래를 부르다가 이제는 복지영역도 민간에 맡겨야 한다는 소리 하시는 분들.
취약계층에게 주어지는 '현금성 혜택'을 줄여 사기업이 복지 사업을 하게 한다는 것이 이번 정부의 복지정책 방향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몸이 불편하거나 늙었거나 가난하거든 감히 '취향' 도 찾지 말고, '계획' 도 하지 말고, 능동적으로 무언가를 운용 하지 말라는 것이다. 주는대로 감사히 받아서 얌전히 숨어 살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일부의 생각이겠는가? 자신의 가게에서 물건을 구매한 고객을 대상으로 '내 돈'으로 먹고 산다는 헛소리를 아무 문제의식 없이 떠벌리는 것이 그 시장 상인 하나 뿐일리 없다.
세금 많이 낸다며 멸시와 혐오를 정당화하던 아주머니, 누군가의 눈에는 당신이 파는 물건이 고작 싸구려 신발일 뿐이고, 당신이 살아가는 터전인 시장이 지저분하고 불편하기만 한 곳일지도, 당신도 고작 장사꾼 따위일지도 모른다.
세상이 이토록 천박하다. 나도 뭐. 꼿꼿하기만 할까. 그래도 아직은 염치는 알고 살았으면 좋겠다.
이, 신발같은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