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윤석열 탄핵소추안은 총 투표 수 300표 중, 가 204표.......”
2024년 12월 14일, 대통령 윤석열에 대한 탄핵소추가 국회를 통과했다.
숨죽이고 기다리던 사람들의 함성이 세상을 덮었다.
너나도 없었고, 어리고 늙음도 없었다. 내 앞의 젊은 연인들도, 그 옆의 할아버지도, 그 앞에 혼자 서 있던 아주머니도, 나도 마음껏 소리를 질렀다. 부끄러움 모르고 눈물을 질금거리면서 팔짝팔짝 뛰었다.
기쁨에 겨운 사람들의 머리 위로 ‘다시 만난 세계’가 울려 퍼졌고, 먼 하늘에 풍선이 날았다.
평소와 크게 다를 것 없던 밤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걸터앉아 책을 펼쳤다가 나도 모르게 핸드폰을 켜고 유튜브를 켰었다.
전혀 특별할 것 없는 의지박약, 즉각적 도파민 중독자의 밤풍경이다.
유튜브를 켜자마자 누군가 국회 담장을 넘는 영상이 보였다. 그 아래 ‘비상계엄’ 이라는 황당한 글자가 적혀있었다. 이건 또 무슨 가짜뉴스인가, 장난이 지나치다 생각하며 손가락으로 스크롤을 내렸는데, 장난도 아니고 가짜도 아니었다.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전시도 아니고, 전시에 준하는 상황도 아니고 치안유지가 불가능한 폭동상황도 아니다. 그런데 갑자기 계엄이라니?
이 황당한 비상계엄 사태는 국회의 계엄해제 표결로 6시간 만에 정리되었다. 어안이 벙벙하고 허무한 기분까지 들었다. 현실 감각이 없었다. 이게 뭐야?
장난같은 현실이었지만 속속 밝혀지는 뒷사정은 끔찍했다. 이것은 오래전부터 치밀하게 준비된 계획이었다. 국민의 선택으로 대통령으로 선출된 자의 머릿속에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모든 이들이 반국가 세력이며, 종북세력이며, 척결되어야 할 괴뢰 집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정책에 협조하지 않고, 나의 흠결을 지적하는 모든 것들을 ‘국가 위기 상황’으로 규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나에 대한 반발을 ‘국가’ 의 비상사태로 인식하고 언제든 ‘계엄’이라는 칼로 악의 무리를 처단할 계획을 품고 있었던 모양이다. 난데없이 현장에 복귀하지 않는 전공의를 ‘처단’ 하겠다고 하지 않는가.
그날 밤, 국회 담장을 넘은 국회의원들이 있었다. 한걸음에 달려가 무력 앞에 맨몸으로 선 시민들이 있었다. 총기로 무장한 군인들 앞을 막아선 청년들과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었다. 그리고 명령 수행에 소극적이었던 군인들이 있었다. 시민들의 힘에 밀려주고, 뒷걸음질 치고, 유리창은 깼는데 정작 창 앞의 화분은 손으로 치우고 느릿느릿 진입했다. 이들의 망설임과 머뭇거림이 우리를 살렸다.
누군가는 잠들어 깨어보니 모든 상황이 끝났다며 황당해하던 이 어이없는 상황이 사실은 우연과 우연이 겹치고 저마다의 선한 마음이 모여 바람의 흐름을 바꾼 것이다. 이 선하디 선한 국민성에 눈물이 고일 법도 하지만, 그럴 틈도 없이 화가 치밀어 올랐다.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은 300명이다. 그중 현 여당인 국민의 힘 소속 국회의원은 108명이다. 그날 밤, 18명만이 계엄해제 표결에 참여하였다. 야당 국회의원들이 담을 넘던 그 시간, 대부분의 국민의힘 의원들은 당사에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그들은 개개인이 헌법기관이라는 자리의 무게를 망각한 채,‘문이 막혀서 못 들어갔다.’ ‘이미 표결이 끝났다’는 등의 핑계를 대며 당사에 모여 조용히 처분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뿐인가? 2024년 12월 7일 국회 본회의에서 그들은 김건희 특검법을 부결시키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듯 유유히 본회의장을 빠져나갔다. 그 날 대통령 윤석열 탄핵 소추안은 그대로 폐기되었다. 국회 담장 너머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찬 바닥에 앉아 그들이 낄낄 웃으면서 등돌리고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그 안에 있었다.
12월 6일. 1차 탄핵안 표결 하루 전, 나는 지역 국회의원 사무실로 쳐들어갔었다. 정정한다. 정중하게 전화로 방문 사실을 알리고 갔다. 나는 어떤 무리와 달리 품격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얼마간의 대화 끝에 몸에 밴 양, 입 끝에 싱글싱글 웃음을 달고 있는 60대 책임자라는 사람에게 진심으로 물었다.
“당신들이 지지하는 후보가 대통령이 되고, 국민의 힘이 정권을 가졌으니 행복하셨겠다. 그런데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냐?”
아주 잠깐 그의 입끝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은 시쳇말로 ‘개가 나와도 그당’ 이라 해도 될만한 지역이다. 지금 현직 국회의원인 그는 지역에서 뼈가 굵은 정치인이며 그와 얽혀있는 지역 인사들이 줄줄이 굴비이다. 얼기설기 온갖 이권과 알력이 뒤엉킨 그들만의 세상이다. 그러니 나의 항의쯤이야 가소로울 것이었다. 그런 사정을 모르지 않았으나 누구라도 하나 가서 스트레스라도 주고 싶었다. 혹시나 하는 일말의 아주 작은 기대도 있었다. 저 인사가 혹시라도 표결에 참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럴 리 없다. 그는 표결에 불참했고, 이후 그의 사무실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2차 표결을 앞두고 그의 사무실 앞에 쪽지를 붙였다. 바로 앞 주자창에서 요금을 받는 일을 하는 70대쯤 되어 보이는 노인이 다가와 뭐 하는 거냐며 날을 세웠다. 굳이 대꾸를 하지 않았다. 대충 눈으로 쪽지의 내용을 읽은 노인은 혀를 차며 ‘별 지랄을 다한다’ 고 구시렁 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설명하지 않았다. 각자의 세상을 인정한다. 다만 한마디는 보탰다.
“나는 아저씨 생각에 관심 없으니 아저씨도 내 지랄에 참견 마시라.”
얼마지 않아 쪽지는 사라졌다. 그래서 이번에는 직접 전달했다. 내내 연락이 되지 않던 해당 의원 지역사무실이 연락이 닿기에 직접 찾아가서 시민 한 사람의 의견을 서면으로 전달했다.
알고 있다. 시골에 처박힌 무명작가가 무슨 영향력이 있겠는가.
어쩌면 이름 없는 자의 서러운 분풀이였을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 순간 그들이 조금이라도 스트레스 받기를, 내가 쓴 문장 마다 의원님이 아닌 따박따박 ‘ooo씨’ 라고 불리는 자신들의 ‘봉건영주’의 이름을 보며 조금이라도 마음이 상했기를 바랐다.
그리고 다음 날, 대통령 윤석열 탄핵안은 국회를 통과했다.
한바탕 축제같은 현장을 빠져나와, 보름달이 뜬 한강변을 따라 걸었다. 후련한 한편 내내 찜찜하고 무거웠다.
이 오묘한 기분의 바탕은 ‘다시 만난 세계’와 ‘임을 위한 행진곡’ 의 가사를 모두 알고, 부를 수 있으나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어색함 때문이었을까. 복잡하고 미묘한, 알 수 없는 한숨이 새어나왔다.
나는 피 흘리며 민주화를 쟁취한 세상을 모르며, 태어나보니 당연하게 누리던 민주화가 박살나는 세상도 모른다. 1990년대 후반에 학교를 다닌 나는 운동권이니 투쟁이니 민족이니 하는 단어는 철 지난 유물이라 생각했고, 여전히 남아있는 그들만의 위계질서가 구역질 나서 기강 잡던 선배의 면전에 대고 ‘언니, 재수 없어요.’를 내 던지던 사람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안 가결에 반대해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촛불을 들었고,이명박의 명박 산성을 눈 앞에서 보았다. 살수차가 밝은 눈을 밝히며 올라오는 광경을 목격하고 공포에 떨었고, 노무현이 세상을 떠났을 때 광화문 광장에 주저앉아 밤까지 술을 마셨다. 그리고 박근혜 탄핵 촉구 촛불이 천만을 돌파하던 날에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2024년 12월, 국회 앞에 있었다. 이토록 일관성 없는 일관성이다.
그러니 나는 막연하게 역사가 진보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내심 그 굽이굽이 발자취에 지나가는 행인1일지라도 함께했음이 즐거웠다. 남들 다하는 축제에 끼지 못하면 서운해서 기어이 끼어들었다. 그런데 이번엔 즐겁지 않았다. 허탈하고, 허무하고, 쓸쓸했다. 다시만난 세계와 임을위한 행진곡이 왜 함께 불려야 하는가. 왜 이들이 함께 해야 하나. 그 긴 시간동안 왜 같은 일이 반복되는가.
대통령으로 선출된 윤석열. 그가 그럴 줄 몰랐을까?
누군가는 이렇게들 말한다. 정말 이정도인줄은 몰랐다고.
그런데 지금이 어떤 세상인가.
손바닥에 '王' 자를 그리고 나오고, 기차 좌석에 구둣발을 올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선거를 도와주는 당직자에게 삿대질을 하는 모습이 실시간으로 중계되었다. 선거기간 내내 건들거리며 어퍼컷만 날렸다. 그 ‘꼬라지’를 보고도 이럴줄 몰랐다는 건 비겁하다. 그 이상 어떤 ‘꼬라지’를 봐야 심각하다 할 것인가? 그냥 그럴줄 알았지만 나의 ‘이익’이 중요하다고 하자.
백성은 사람이 아닌 ‘개돼지’라던 시절이 있었다.
정치는 하늘이 내린 왕이 하는 것이며, 왕의 부름을 받은 귀족들이 그를 돕고, 소, 말, 개돼지를 부리듯 백성을 잘 부리는 것이 참된 정치라는 세상이 있었다. 그것이 당연한 시절이었다.
그 시절이 끝난 지 100년이 넘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배웠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주권이 있는가.
역사는 정말 진보하는가?
모든 가치판단이 ‘나의 이익’으로 치환된 세상에서 ‘나의 이익’을 따라 국가의 지도자를 뽑았다. 그 결과 스스로를 왕이라 믿는 자가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국회를 향해 헬기를 띄우고, 장갑차를 몰았다. 납득하기 어려운 궤변으로 국민의 일상을 파괴했으며 많은 이들이 ‘삶이 부서질까’ 공포에 떨었다. 나조차도 그랬다. 국회의원 사무실에 쪽지 한 장 붙였다고 재물손괴로 잡아가는 건 아닌가를 걱정해야 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무혐의로 끝났지만 포스트잇을 붙인 여고생을 고발한 사건이 있었다. 곤봉으로 머리를 치는 대신, 돈줄을 말리고, 밥줄을 끊고, 기소와 수사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괴롭히는 세상이다. 정말 진보하였는가?
'내란'의 시간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그날 밤에 옹기종기 모여있던 국민의 힘 의원들은 국회로 달려가는 대신 의원총회 타령을 하고 있었고, 내 주식 걱정에 ‘주식장’을 닫아야 한다는 한가한 소리나 하고 있었다. 헌법기관의 의무는 망각한 채, 법위에 당론이라며 당당하게 표결에 불참했다. 지금은 헌법재판관 3인의 임명을 방해하고 있고,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미루려 하고 있다. 어떻게든 ‘왕’의 귀환을 꿈꾸고 있다.
다른 이유는 없다. 윤석열을 사랑해서도 아닌 듯하다. 오직 나의 ‘뺏지’ 때문이다.
1년만 지나면 잊고 또 뽑아주는 ‘개돼지’들을 믿고 있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사실 정파와는 상관없다. 이 상황에서도 시민들의 촛불집회에 나와 자기 이름 알리려고, 지인과 짜고 티나게 소개해 주고, 마지못해 응한 척 마이크 잡고 연설하는 전직 시장도 있었고, 그를 연호하는 전직 시의원도 있었다. 이들은 정치를 뭘로 배웠는가.
이제 헌법재판소 판단이 남았다.
당연한 일이 당연한 일이 아닌 세상에서 이조차 마음을 졸인다.
윤석열이 당당하게 귀환한다면? 우리는 평화롭게 응원봉을 들고 민주주의를 외칠 수 있을까.
오래 살지 않았는데, 너무 오래 산 기분이다.
별 꼬라지를 다 보고 산다.
여의도 찬바람의 후유증인지 감기가 지독하게 걸렸다.
기침에 두통에 정신이 없어서 해야 할 이야기를 하지 못한 채 머뭇거리고 있다.
어안이 벙벙한 날들이다. 그러나 이것도 역사다.
어안이 벙벙한 역사의 흐름에 올라 탄, 아무도 모를 시골 무명작가의 개인사를 이곳에 남긴다.
이제부터 스스로 던진 질문, ‘나의 이익 앞에서 나는 어디까지 사람다운가.’ 에 대한 답을 찾는 이야기를 쓰려고한다.
그 이야기가 세상에 나오면, 그를 본 누군가가 또 다른 질문을 던져준다면 좋겠다.
하루하루 모든 이들이 안녕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