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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jak Jun 22. 2023

흐린 날을 좋아하는 아날로그 옛사람.


하늘이 흐리면, 비가 내리면 마음이 차분해지는 사람.

어릴 때는 비오는 날 비맞고 다니는 걸 좋아했고,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깨는 것을 좋아했고, 낯선 여행지 고택 툇마루에 누워 마당을 패는 빗물을 바라보기를 좋아했다.     

쨍한 날보다는 흐린 날의 숨이 가볍다. 


그래서 그런가? 이놈의 인생에는 볕들 날 보다는 먹구름이 많은 것도 기질 탓인지도 모르겠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맛을 들이는 중이다.


새벽 5시, 혹은 6시.      


내가 아무리 빨리 일어나도 나보다 빠르거나 내 기척 소리에 덩달아 움직이기 시작하는 모친덕에 유튜브의 ‘갓생 모닝루틴’ 같은 고요한 아침은 남의 이야기다. 


거실 한 가운데 매트를 깔아놓고 동영상을 보면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으면 모친이 훈수를 둔다. 

쟤는 팔을 다 폈는데 너는 굽었다는 둥, 다리 방향이 틀렸다는 둥.      


훅,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지만 어떻게든 관심이리라. 다정한 말 한마디, 응원에 인색했던 노인네의 서툰 방식이리라 싶어 눈을 질끈 감는다. 어쨌든 굿모닝이잖아. 


그러면서도 내내 무기력에 빠져 늦잠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던 내가 꼬물꼬물 움직이는 꼴을 보니 내심 마음이 놓이는 모양이다. ‘어째 다시 안 자고....잘했네.’ 한마디를 툭 던져놓고 이른 아침을 하느라 부산하다. 그러고 보니 우리 모친은 평생 5시 언저리에는 일어났다. 그렇다면 평생을 미라클 모닝을 하며 살았다는 얘긴데, 나의 모친은 부자가 되진 못했다. 미라클 모닝이 부를 불러준다느니, 성공을 부른다느니 하는 말은 믿을 말은 못 되나 보다.  

    

결론은 제 할 나름.          




실상 미라클을 기대하고 꼭두새벽에 일어난 것도 아니다. 잔다고 나아질 게 없고, 허리는 오지게 아프고 덩달아 고관절도 아프고, 무르팍도 아팠다. 그냥 흘려보낼 시간에 스트레칭이라도 해보자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일어나서 꼬물거리다 보니 커피 마시고, 샤워하고, 밥 먹고, 할 것을 다 해도 아침 8시가 되지 않았다. 

작업실에 나와 노트북을 켜고,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는 한글창을 바라본다.


끔벅거리는 커서와 장단이라도 맞추려는 건지 나도 그저 눈만 끔벅끔벅.     

쓰다가 멈췄고, 쓰다가 멈췄다.

구멍이 많은데, 어디부터 채워야 할지 몰라서 에라, 이 썅. 덮어버렸던가?

까마득함을 애써 무시하면서 다시 처음부터 생각해 본다.

그러니까 이러쿵 저러쿵 이런 애가 말이지 저런애를 만났는데 말이야. 하필 저런 것들이랑 싸워야 하네. 음.....어쩌라는 거지?

뭘 쓰긴 썼는데, 여전히 안갯속이다.      


문서의 인쇄를 눌렀다. 본분을 잊고 잠만 자던 프린터가 간만이 일을 하셨다.

인쇄된 초안을 옆에 놓고 먼지 쌓인 스케치북을 연다.     



발만 네 개라고 할 만큼 손재주가 없어 그림은 그릴 줄 모르지만, 스케치북에 이야기의 그림을 끄적인다. 아래 한글 프로그램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울퉁불퉁, 가지런히 줄이 그어진 노트 위에 얹기엔 도무지 단정하지 못한 생각의 끝자락을 제멋대로 휘갈기는 중이다.      



창밖으로 먹구름이 내렸다. 

마음이 좀 괜찮다.      





나는 옛날 사람이다.      

국민학교를 다녔다. 

델몬트 주스병에 보리차를 마셨다.

아메리카노가 아니라 원두커피 라는 이름의 커피를 즐겼다. 

2002년 월드컵 때 강남대로 중앙분리대 위에서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과 하이파이브를 했다.      


햇병아리 작가 지망생이었던 20대 초중반, 당시의 방송사 ‘극본공모’는 원고를 ‘직접’ 방문접수하거나 우편으로 접수해야 했다.  


mbc 가 여의도에 있던 시절, mbc 지하에 접수대가 있었고 접수대에는 무표정한 조연출이 세상 무료한 표정으로 앉아 원고를 받고 있었다. 


사실 그는 작가지망생들 사이에서 나름 유명인사였다. 극본공모 Q&A 게시판에 '바람난 아버지' '불륜' '80년대 산동네' '무작정 떠나는 여행에서의 어떤 일' 등은 가차없이 탈락이라고 공언하였으며, 원고를 아무리 예쁘게 제본해서 와도 다 뜯어버리니 쓸데없는 데 공 들이지 말고 내용에 충실하시라며 더없이 극성맞은 지망생들과 (무언가를 지망하는 이들은 좀 그러한 구석이 있다. 변명하자면 간절함이 부른 예민함이라고 하자.) 기싸움 혹은 키보드 배틀을 하였다.

자신의 실명과 조연출이라는 신분을 밝힌채로 Q&A 댓글로 키배를 떴으니 그의 사원증에 걸린 이름을 보고 단박에 그가 누군지 알아볼 수 밖에. 


마감이 임박하여 몰려든 작가 지망생들은 신주단지 모시듯 소중하게 품고 온 원고를 접수했고, 그 원고를 받아든 조연출은 원고표지에 접수증을 붙인 후, 이삿짐을 나를 때 쓰는 대형 트레이에 담긴 빈 A4 용지 박스안으로 툭툭 원고를 던졌다. 큼직한 트레이에 원고가 어느정도 쌓이면 알바생으로 추정되는 이들이  나타나 드르르르륵 원고를 밀고 사라졌다.    

  

이미지 출처: GOOGLE


사실 이삿짐처럼 실려가는 원고의  대부분이 탈락할 것이 자명한데, 끝없이 의심하면서도 결국은 스스로의 가능성을 어떻게든 합리화 하면서 만들어낸 원고를 품고 나타난 지망생들은 그 순간이 잔인하도록 허무했을 것이다. 지독한 간절함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일상의 무심함을 생생하게 눈으로 보았던 , 에두를 것 없는 날것의 시간이었다.


원고를 접수하러 오는 이들 중 아는 얼굴들이 듬성듬성 보였고, 어떤 언니는 10편을 접수했고, 누구씨는 20편을 접수했다는 말들이 나돌았다. 각자 인생의 어느 토막을 갈아 넣은 것들이었다.      




원고접수 마감 5분 전 쯤, 다른 문우(文友)의 전화를 받은 어떤 이가 수화기를 든 채 후다닥 뛰어들어왔다.    

  

“잠깐만. 내가 물어볼게.”


그는 손바닥으로 전화기를 막고 접수대의 조연출에게 물었다.       

         

“지금 오고 있다는데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안 될까요?”

“......어딘데요? 얼마나 기다려 달라는 거죠?”

“거의 다 왔대요. 10분이나 20분?”

“.....그러세요.”     


조연출은 무료한듯 볼펜을 튕기며 다리를 떨었다. 

얼른 몸을 돌린 그가 말을 이었다.    

  

“안된데. 그냥 오지 마. 내가 그쪽으로 갈게. 술이나 한잔 하자. 잘 고쳐서 다음에 내면 되잖아.”      

         

저토록 간절한 비열함이라니.     


     



멋모르는 햇병아리는 내 원고가 실려 가는 큼직한 트레이를 지근하게 바라보았다.


'혹시 저러다가 잃어버려서 심사도 못 받고 떨어지는 건 아니야?' 

    

그런 걱정따위 전혀 할 필요가 없었음은 내 글을 보는 눈이  어느 만큼 객관화 되었을 때 낯뜨겁게 깨달았다.      


옛사람이 되어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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