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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jak Sep 21. 2023

나는 플라스틱 빨대가 필요해.

종종 맥도날드 드라이브쓰루를 이용한다. 그때마다 눈에 들어오는 문구가 있다. 

   

<뚜껑이를 이용해 주세요. 빨대는 은퇴했어요>     


이미지 출처: 프라임 경제 카드뉴스.


맥도날드는 플라스틱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컵에 대고 마시는 <뚜껑이>를 채용(?)하고 빨대 은퇴식까지 열었다고 한다. 유쾌하다.           


대세는 친환경이다. 온갖 제품들에 '친환경' '자연친화' 등이 달라붙었다.  특히 플라스틱은 역적이다. '플라스틱 빨대' 하면 바로 뒤따라 떠오르는 '바다거북이 코에 꽂혀있는 플라스틱 빨대'의 이미지는 우리가 무심코 사용한 ‘무기’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준다. 

이미지 출처: illust AC



동의한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나 무신경했고, 이기적이었다.      


그런데 나는 맥도날드에서 <은퇴한 빨대> 라는 문구를 접할 때마다 조금 섭섭하다. 어떤 경우에도 빨대는 제공되지 않는 것일까? 물론 물어보지 않았지만, 은퇴식까지 했으니 빨대는 없겠지.      


<아니, 조금 불편해도 참으면 되지, 익숙해지면 금방 괜찮아질 텐데 그걸 못 참아서 빨대에 미련을 두나. 빨대 없이 물도 하나 못 마셔?>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 물도 못 마신다. 정확히는 ‘잘’ 못 마신다.      




내 동생은 장애인이다. 제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수십 년 함께 살아 온 가족들만 알아듣지 남들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외계어를 쓴다. 그 외계어로 종알종알 제 언니 부리기를 종처럼 부려 먹으면서 이것저것 요청하시는 바가 굉장히 많으시지만 누구나 그러하듯 ‘가족’이라는 둘레 안에서나 통하는 짓이다. 이 울타리를 벗어나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이 친구는 모든 것이 어눌하다. 제 힘으로 일어나 걷지도 못하고, 언어도 정확하게 구사하지 못하며 젓가락질이나 단추 꿰기 같은 미세한 동작은 전혀 하지 못한다. 물컵으로 물을 마실 때도 장애가 없는 사람들의 몇 배의 힘을 들여야 한다. 근육의 미세한 조절과 움직임이 어려운 탓이다. 같은 이유로 (조금 더러운 이야기지만) 입안의 음식물이 들락날락 거리는 통에 물컵에 음식물이 둥둥 떠다니는 것은 예삿일이다. 그리고 물이나 음료를 마시다가 사레들리는 일도 잦다.      


이런 동생에게 플라스틱 빨대는 삶의 질을 높여주는 유용한 물건이다. 그래서 우리 집 싱크대 서랍 안에는 플라스틱 빨대가 한가득이다. 물론 종이 빨대로 대체할 수도 있겠다 생각하겠지만 위에 언급했듯 미세한 조절이 어려운 사정으로 빨대를 입에 지그시 무는 것이 아니라 꾹꾹 씹어 대며 음료를 마시는 모양새라 종이 빨대는 물 한 컵을 채 비우기도 전에 작살(?)이 날 것이다.      


빨대가 달린 전용 물컵을 구비하면 될 일이지만, 매번 씻어 말려도 곰팡이를 피하기 어렵다. 일일이 분해하고 솔로 씻고, 소독해야 겨우 유지가 된다.  그저 생각 없이 마시는 물 한잔이 그야말로 '일'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예상가능한 플라스틱 빨대의 대안을 하나하나 방어하고 변명(?)하려고 보니 이런 생각이 든다.      

아니, 사는 것 자체가 고행인데 그렇게 불편하게 살아야 해?     




아빠가 살아계실 때, 엄마가 덜 아팠을 때, 나도 좀 젊었을 때.

그러니까 오래전이다. 


그때는 1, 2주에 한번 동생을 데리고 대형마트에 장을 보러 갔었다. 마트 안 푸드코트가 휠체어를 탄 동생을 데리고 편히 식사를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간이었기에 장보기의 목적보다는 외식의 목적으로 대형마트에 갔었던 것이다. 주로 사람이 별로 없는 평일 낮시간에 갔었고 물을 마실 때면 동생의 휠체어 주머니에서 플라스틱 빨대를 꺼내 물을 마셨다. 이미 휠체어에서부터 시선을 끌기 딱 좋은데 안 보는 척하면서도 힐끔힐끔 먹는 모양을 살피는 사람들 틈에서 물 마시다 사레들려 기침이라도 할까 신경이 쓰였고, 물 컵안으로 음식물이 들락거리는 모양새도 보기 좋지 않으니 플라스틱 빨대는 우리 가족의 품위유지 수단이었다.      

제 언니가 얼마나 신경을 세우고 사주경계를 하는지 관심도 없는 동생냔은 엄마가 썰어주는 돈가스를 날름날름 잘도 받아먹었다.     


이제는 아빠도 없고, 엄마는 아프고, 나도 시원찮아서 그 친구는 바깥 구경이 어렵게 되었지만 우리는 지난 세월, 그때그때 할 수 있는 만큼의 행복을 꾸리며 살려고 애썼다. 말 그대로 ‘애써야’ 하는 것이 못내 서러운 지점이다만 아무튼 그러했다. 




모두에게 같은 것은 없다.


세상에 때려죽여 마땅한 범죄자를 제외하고는 누군가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더없이 웬수 같은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나한테는 개새끼가 누군가에게는 왕자님이라고 하지 않는가.


세상이 모두 나서서 ‘퇴출’을 외치는 플라스틱 빨대조차 어떤 이들에게는 필수품이기도 하다. 나는 너저분하다고 제발 버리라고 하는 물건들이 늙은 엄마에게는 애틋하고 소중한 기억이다.     

 

그러니 감히 ‘이것은 이것이다.’라고 명확히 규정하기가 머뭇거려진다.

내 생각이 틀림없이 옳다고 말할 수도 없다. 


지구를 생각하면 플라스틱 빨대는 퇴출되어야겠지만, 당장 내 동생을 생각하면 플라스틱 빨대는 있어야 한다. 전 지구적으로 명확한 사안 앞에서도 나는 슬그머니 반기를 들고 싶어 지는데, 사사로운 일들은 오죽할까.          

무슨 일만 있으면 ‘싹 쓸어버려라. 싹 다 없애 버려라.’ 라며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을 만나면 속엣말로 중얼거린다.      


‘너는 아쉬운 것이 없어서 좋겠다.’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그렇다. 

글을 쓴다고,  무언가를 두고 '이것은 틀림이 없다.'라고 손을 놀리기가 힘들다. 



맥도날드 드라이브 쓰루에서 ‘뚜껑이’를 볼 때 마다 나는 좀 섭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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