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된 무력감:
피할 수 없는 힘든 상황을 반복적으로 겪게 되면 그 상황을 피할 수 있는 상황이 와도 극복하려는 시도조차 없이 자포자기하는 현상이다.
<출처: 네이버>
늦잠을 잤다. 11시에 일어난 것이다.
눈을 뜬 것은 아침 7시였지만 다시 침대로 기어 들어갔다.
뒤따르는 생각은 ‘또 시작이군.’
이러다가 아무것도 못하고 세월을 흘려보내겠지. 아휴 징그러워.
아침에 일어나니 엄마는 컨디션이 바닥이다. 건강이 좋지 않은데다 지난 세월 몸에 익은 이른바 ‘징징’ ‘짜증’ ‘신세한탄’ 이 기본값이라 이런 날은 말을 붙이지 않는 편이 좋다.
당장 나는 의사도 아니고, 약사도 아니다. 내가 뭘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병원 갈래?’ ‘병원 가.’ ‘ 죽 사다 줘?’ 정도의 말이나 할 수 있을 것이고. 짜증(원인은 내가 아니겠지만, 본인도 본인 사정에 의한 것이겠지만)담긴 어조로 ‘싫어.’ 라거나 ‘돼써어어....’ 라고 할텐데 그러면 또 나는 울화통이 치밀 것이다.
그래서 그냥 눈을 감았다.
나이든 부모가 아픈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세상에 덩그러니 혼자 남다못해 몸이 불편한 동생까지 세트로 남을 나는 조금 막막한 것이 사실이다. 이토록 독립적이지 못하고 끈적거리는 감정을 심어준 것은 엄마의 책임도 있으니 좀 원망하자.
12살짜리 애한테 장애가 있는 동생을 업혀 내 보낸 그 순간부터 이렇게 될 일이었다.
그러니 엄마도 (어쩌면 하나같이 잘되기만 했는지 알 수 없는)다른집 자식들처럼 돈 잘버는 신랑 만나 애 낳고 좋은 집에 살면서 명절이면 바리바리 선물이 들어오는 그런 딸이 못된 것에 대해 마냥 서운해 하지는 말아야 할 일이다.
생각이 이렇게 되면 되물림 되는 신세한탄과 자포자기만 남으니 그냥 죽은 듯 자든가 어쨌든 떨치든가 할 일이었다. 한때는 뭔가를 ‘끊어’ 보겠다고 집안을 뒤집어 청소를 하거나 괜히 연락을 다 끊고 잠수를 타곤 했는데 그런다고 끊어지는 것은 없었다.
아무튼 뭘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상황에서 오란데도 없고, 갈 데도 없으나 꾸역꾸역 일어나 샤워를 했다. 작업실로 나왔는데 일은 되지 않고, 그래서 그냥 글을 썼다.
지금 브런치 공간에 연재하는 글은 힘을 뺀 글이다. 실은 그냥 ‘쓰기만’ 한다. 퇴고나 수정은 나중일이다.
예전, 처음 시나리오 공부를 하던 시절, 합평시간마다 작가는 방어에 바빴고 독자는 공격에 바빴다.
누군가가 겸손의 표현으로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아서 하루 전에 겨우 썼습니다. 부족해도 양해 부탁드려요.’ 라고 했다가 ‘이 귀한 시간에 왜 하루만에 쓴 글을 읽어야 하죠? 그럴 가치가 있나요? ’ 라는 답을 듣고 펑펑 운 사람이 있었다.
아니, 하루 만에 썼으면 어떻고, 반나절 만에 썼으면 어떤가.
그저 쓰는 동안에 <이유>를 찾아내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남의 인생 그렇게 크게 관심도 없으면서 뭘 그렇게 까지 '시간의 의미'를 찾나.
사실 내가 지금 그러고 있다. 콩알만큼의 재능을 (나혼자) 발견하기도 하고 잊고 있던 흐름을 찾기도 하고, 손끝의 감각을 느끼는 것으로 견뎌내는 중이다.
사실 무기력이 더 크다. 학습된 무력감이든 실체가 있는 무력감이든,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이 묵직하게 눌러오는데, 그럼에도 깔딱깔딱 숨을 쉬느라 겨우 글이라도 쓰고 있다.
시작은 했으니, 끝은 볼 것이고.
힘이 난다면 다음 계단을 밟을 것이지만.
솔직히 오늘은 지고 싶다. 근데 내가 졌다고 삶이 끝나지를 않으니, 그게 또 문제다.
투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