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졸업한 지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3월이 되어야 뭔가 시작하는 느낌이 듭니다.
습관이거나 핑계이거나.
늦여름 즈음 간단한 소식을 전했는데, 벌써 또 봄이 곧.입니다.
마지막으로 올린 글이 <글쓰는 사람 이었던 사람> 이었던 만큼, 저는 그동안 글하고 비슷하게 생긴 것도 쓰지 않고 지냈습니다.
라고 써놓고 보니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을 소식을 누구에게 전하는 것인가? 잠시 머쓱하였으나 그냥 자문자답 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저도 가끔 제 소식이 궁금해요.
‘너 잘 살고 있는거니?’
저는 잠깐 직장인의 삶을 살았으나 12월 31일부로 쿨하게 회사를 떠났습니다.
블라블라 많은 일이 있었으나 마냥 싫기만 한 것은 아니었고, 다들 그러고 살 듯 좀 참고 버티면서 지낼 수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냥 안하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뒷 이야기를 풀면 블랙코미디 한편 제대로 찍었지만, 늦된 저는 이제야 ‘지난 이야기’를 하는 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배워가는 중이라, <그저 그러하였다> 로 마무리합니다.
제 동생이 태어났을 때,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입 달린 사람들은 전부 ‘사람 구실 하기 어려우니’ 그냥 포기하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어찌어찌 인큐베이터에서 겨우 숨을 붙여놓았던 아이가 퇴원 길 택시 안에서 또 숨이 넘어갈 듯 넘어갈 듯 하더랍니다. 동승 했던 이모가 그냥 놓아주자고 했지만, 아이를 안고 있던 아빠가 도저히 그럴 수 없어서 차를 돌려 다시 병원으로 갔고 그 아이는 살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 살기 힘든 심한 장애를 갖고 살지만, 딱히 ‘사람 구실’이 없는 건 아닙니다. 좋게 생각하면 아직도 아이 같아서 덩달아 저도 애가 되는 마법의 시간을 담당하고, 짠하게는 못 돼먹은 언니의 ‘너 때문에’를 담당하였으니 한편 짠하고 미안합니다.
아무튼 입 달린 모두가 ‘사람 구실 못한다’ 하던 그 친구는 어찌저찌 구실을 하는 것 같습니다.
뜬금없이 그러면 나는 어떤가 싶습니다. 구실을 하나?
불쑥 예정에도 없던 글을 시작한 김에 도대체 어떻게 살고 있는 건가 찬찬히 생각해 봅니다.
일단 제 근황은 혹입니다.
몇 해 전 가슴에 멍울이 만져져서 확인해 봤더니 되게 큰 혹이 있었구요.
(암은 아니라고 했고, 주기적으로 관찰하라고 했는데 그냥저냥 살다 보니 미뤄지고, 미뤄지고...)
그러다가 코로나가 대 폭발하던 시절, 코로나 증상과 함께 목에 멍울이 만져져서 확인했더니 정작 그쪽은 정상 조직이었으나 갑상선에 혹이 있답니다.
혹 +1
그렇게 또 시간이 흘러 어쩌구 저쩌구 살고 있는데, 이번에는 담석증이 찾아왔습니다.
(2023~2024시즌)
결국 담낭제거 수술을 했고, 수술 전 CT 검사결과를 전하던 의사가 무심하게 툭 한마디 던집니다.
"일단 담석이 있는걸 확인했고, 자궁에 근종도 있네요. 나중에 진료 한 번 받으세요."
혹 +2
그렇게 담낭을 보내고, 혹을 하나 얻었습니다.
그렇게 어리바리 지내다가 다음 해에는 얼굴이 돌아갔구요. (2025시즌)
일단 얼굴이 그 모냥이니 자궁 근종 따위 잊고 살았지요.
사실 있으면 어쩌라는 건가 싶었습니다.
여성분들은 아시겠지만, 그 산부인과 진료라는 것이 참으로 적응이 안 되는 자세입니다.
그래서 얕은 지식으로 근종은 딱히 치료법이 없고, 암으로 자랄 확률도 적으니 그냥 두는 게 대부분이라고 하더라구요. 그러니 딱히 심각성을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채로 돌아간 입이 제자리를 찾고, 회사에 들어갔다가 회사를 그만두고 보니 새해가 되었습니다. 1월은 내내 즐겁게 놀았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남들 눈에는 365일 할일 없이 노는 사람같이 보였을(그렇잖아요. 실패한 전업작가라는 것이 뭐...) 제 삶에서 이렇게 걱정 없이, 죄책감 없이 논 적이 없어요. 매일 넷플릭스를 보고, 시덥 잖은 웹서핑을 하고,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잤습니다. 토실토실 살이 오르고, 꼬라지는 말이 아니거나 말거나 그냥 놀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 2월이 됩니다.
어느 날, 기분이 되게 묘합니다.
뭔가 불편해요. 가슴 쪽이 묘하게 불편하고, 전에 없이 골반 통증이 심해지고...
일어나서 병원을 가기로 합니다.
일단 산부인과를 갔고요.
근종이 있음이 확인되었고, 난소에도 혹이 있다고 합니다.
혹 +3!
그날 뭐라고 뭐라고 했는데 일단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추가검사로 혈액검사를 하라고 해서 그냥 그렇게 돌아왔습니다.
결과는 문자로 알려준다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영상의학과를 갑니다.
가슴을 확인해야 하니까요.
이쪽은 산부인과보다는 영상의학과입니다.
사실 영상의학과에서 가슴(정확히는 유방)초음파를 찍기 전에 꼭 하는 일이 유방 X레이 촬영입니다.
정말 아파요. 기분 매우 안 좋구요. (잘 모르시는 분은 검색을 추천합니다. 설명하기 ..... 예, 뭐 그렇습니다. )
그래서 저번에 갔던 병원 말고, 다른 데로 찾아갔는데 순간 여기가 어딘가 싶었습니다.
1990년대 풍경 그대로인 병원, 원장님은 198x년에 대학을 졸업하셨네요????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지난 번 병원에서는 방사선 촬영을 무조건 해야 초음파를 봐 준다고 했거든요. (여기는 시골이라 영상의학과가 두개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여기도 그렇습니다.
“저 혹있는거 알아요. 그니까 그냥 초음파만.....”
접수데스크의 선생님에게 앓는 소리를 합니다.
“어차피 원장님이 찍으라고 할 거예요. 그냥 찍고 오세요.”
........
기계가 오래된 거라 그런지, 더 아픕니다. ㅠㅠ
X 레이 후, 초음파를 본 결과 혹은 좀 큰 편인데, 일단 암은 아닌 것으로 보이니 지켜보자고 합니다.
그런데 왼쪽에 있는 건 알았는데 오른쪽에도 있다네요. 두 개! (얘들도 모양은 괜찮답니다.)
혹 +4, 5!!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때부터 불안감이 밀려들었습니다.
난소에 혹이 있다는 말을 듣기는 했는데, 혹 모양도 기억이 안나고 왜 굳이 혈액검사를 한 건지 설명을 제대로 해 주지 않았거든요.
의사가 별일 아닌 듯 검사하라고 했으니 별일 아닐 거라 생각하면서도 괜히 불안합니다.
그때부터 의미 없는 검색질이 시작됩니다.
난소암, 난소종양, 난소암 증상, 난소암 혈액검사, 난소암 초음파 모양...........
근데 모양이 기억이 안납니다. 그러니 난소암 모양의 초음파 사진을 보면 딱 그랬던 것도 같고?
선무당이 사람 잡는 이유는 이렇듯 뭣도 모르면서 냅다 불행회로 돌리다가 제 풀에 자빠지기 때문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침 친구와 통화할 일이 있어서 이야기를 하다가 제 혹에 대한 걱정을 쏟아냈습니다. 이게 출산 경험이 없으면 위험도가 높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더니 친구의 답이 참으로 묘합니다.
“그래서 남들 하는건 다 해야 하나봐.”
그게 흔히 말하는 사람구실이라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남들하듯 배우고 남들하듯 결혼하고 남들하듯 출산하고 남들하듯 돈 벌고.
그만큼을 해야 사람구실, 사람노릇인가 싶기도 하구요.
결혼하고 아이 키우는 보통의(?) 삶에 스스로 기특함이 넘쳐나는 친구라 딱히 기분은 안 나빴구요. 그런가? 싶었지만, 단순히 생각해도 그 위험도를 낮추기 위해 출산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습니까.
한 아이의 삶이 장난은 아니잖아요. 부모는 아무나 하는 거 아닙니다.
그렇게 며칠을 핸드폰을 부여잡고 뱃속 깊숙한 곳에 자리한 장기에 대한 검색으로 꽤나 많은 시간을 보낸 날, 병원에서 한 통의 문자가 왔습니다.
결론은 괜찮답니다.
그런데 문자 꼬라지 좀 보세요.
보통은 혈액검사 결과지를 보내주는데, 여기는 덜렁 이렇게 보내놓고 또 한 번 심장 쫄리게 만들더군요.
떨리는 마음으로 전화를 했더니 '난소암 결과는 괜찮아요.' 라고 합니다.
그나저나 나는 무슨 혈액검사를 한 건지 알 수가 없고, 난소의 혹은 도대체 어떤 모양인지 크기가 어떻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다음에 와서 들으면 된다고 하는데, 저는 병원을 옮길 생각입니다.
(역시 시골이라 병원이 별로 없어서 옆 동네로 가야할듯 싶습니다. )
지금 이 글을 왜 쓰기 시작했는가 하면, 제가 또 병원을 가야 하는데 시간이 애매해서 오후 진료시간까지 기다리느라 그렇게 됐습니다. 사실은 며칠 전부터 팔이 아팠는데 이제는 들 수도 없네요. 덕분에 손에 힘이 빠져서 아끼던 컵을 박살을 냈습니다. 그걸 치우느라 어제는 병원에 못 갔고, 오늘은 가려고 했는데 또 늦잠을 자버렸거든요. 어깨나, 팔에도 혹이 있는 건 아니겠죠.
사람은 얄팍한데 자연은 꿋꿋해서 불쑥 공기의 기운이 달라졌습니다.
사람노릇은 뭘까, 사람구실은 뭘까 생각합니다.
딱히 사는 일이 즐겁지도 않고, 그렇다고 막 힘들지도 않습니다.
무심하다 못해 바스락바스락 건조 하면서도 한편 되게 살고 싶나봅니다.
그러니 그렇게 검색질을 했겠죠.
결국은 살고 싶다는 것을 알았고, 그 사람노릇인지 뭔지 기준은 잘 모르겠지만, 잘 살고 싶어서 뭔가를 해보려고 생각을 합니다.
넌 잘 살고 있는거니? 물어봤는데, 잘 살고 싶다고 답하는 군요.
나이를 꼬박꼬박 먹어도 참 여전하군요.
우연히 이 페이지에 머문 분들께.
오늘,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