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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gene May 05. 2022

꾸준함의 꾸준함

나의 '재능'

“진표씨 하이~ 오랜만! 잘 지냈어요? 조금 이따 산책할 건데 같이 갈래요?” 

“네, 좋아요. 그러면 이따 9시에 1단지 쪽에서 봬요.” 


 우연히 SNS 계정을 통해 ‘동네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보통 ‘동네 친구’라 함은, 시도 때도 없이 연락해 밥 먹고, 차 마시고, 함께 운동하는 사이로 통용되지만, (동네에서 함께 큰) ‘동네 친구’가 아닌, (다 커서 알게 된, 그저 같은 동네에 사는 사람)일 뿐인 사이인 친구이기도 할 것이다. 후자의 정의에 가까운 ‘동네 친구’는 아주 가깝지도, 아주 멀지도 않아서 특별한 용건 없이는 연락하지 않게 되고, 그리고 서로가 그것을 정확히 알기 때문에 적당히 편한 사이이다. 이런 관계에서는 나의 재능이 더 빛을 바란다. 


 지난 일요일, 관계에 지친 하루를 보내고, 생각 없이 수다 떨 누군가가 필요했다. 전화 통화로는 부족했기에, 동네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진표씨가 떠올랐다. 그래서 메시지를 보냈다. 진표씨는 마치 내 연락을 기다린 사람처럼, 즉흥적인 나의 제의에 흔쾌히 응했다. 그와 나는 한 시간 가량을 함께 걸으며 묻고, 답하고, 웃었다. 


 직업란에 “Artist”라고 적는 나는 한때 재능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있다. 또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재능이 있는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들을 보며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난감해한 경험도 있다. 예술이라는 영역 안에서 교육을 하고, 받으면서 재능만으로는 버틸 수 없는 분야라고 생각한 날도 적지 않다. 


‘재능’ 없는 사람이 있을까? 

‘재능’의 유무에 있어, 신은 모두에게 공평한가? 


 신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재능’을 나눠주었다고 한들, 자신을 객관적으로 면밀하게 관찰하지 않으면 평생 모르거나, 없다고 판단하기 마련이다. “나는 정말 평범한 사람이야. 그래서 특별한 일을 할 만한 사람이 못돼. 그래서 공무원이 된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은 본인의 ‘재능’을 발굴할 의지가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가령, 그는 오타를 귀신같이 잡아내는 재능을 가진 공무원일 수도, 사람에 따라 응대를 달리하는 순발력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공무원일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예술가의 삶을 살면서, 나의 ‘재능’을 찾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왔다. 지인들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스스로 관찰해오면서 발견한 나의 재능은, 재미와 호기심이 가는 것에 주저하지 않고 시작하는 것”이다.


 동네 친구인 진표씨에게 6개월 만에 갑자기 산책하자고 뜬금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연락한 것은, 그가 이런 연락을 불편해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그와 함께 할 6개월 만의 시간이 재미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림 그리는 내가 글쓰기를 갑자기 시작한 것 또한, 흥분된 마음으로 오래 할 수 있을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나의 삶에는 단순한 재미와 호기심으로 시작한 것들 것 가득하다. 사람과의 관계도, 일도, 취미도. 


 반면, “꾸준하게 시작하는 것”에 재능이 있는 나의 치명적인 단점은 그 시작을 “꾸준하게 지속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재미와 호기심이 금방 채워졌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것들이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때 멈추게 되는 경우가 있다. 애정하는 이슬아 작가가 한 명언이 있다.


 “꾸준함은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재능보다 막강하다.” 


 “시작하는 나의 꾸준함”을 “꾸준하게 하는 것”이 미래의 나에게 주어진 새 막강한 ‘재능’이 되었으면 한다. 순전히 나의 재미와 호기심으로 시작하게 된 많은 것들이 나에게 선택 당한 만큼, 그것을 꾸준히 유지해 재능보다 더 막강한 무엇으로 만드는 일. 즉, “꾸준함의 꾸준함”이 내 미래의 ‘재능’이 되기를 바라며, 다시 글쓰기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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