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예쁘게 잘 긋는 법

시각예술가 O, 35세

by Eugene


“너무나 당연하다고 비집고 들어오는 것들에 맞서”*


작년, 어느 감정사회학 연구자의 강연에서 보았던 제목이었다. 강연의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질 않지만, 제목이 인상 깊어 가끔 이 글귀를 곱씹어본다. 그러고 보면 당연하다고 여기는 모든 순간에 많은 것들이 망가져 버린다. 특히 인간관계가 그렇다. 그렇기에 당연하다고 비집고 들어오는 것에 맞서야 한다. 내 삶이, 관계가 망가지지 않기 위해서는.


“너무나 당연하다고 비집고 들어오는 것들에 맞선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거나 질문해 보는 것, 혹은 선을 넘지 않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2019)도 결국 선을 넘는 행동과 말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 아니었던가.


당연하다고 여기지 않는 것, 그것은 가까운 관계에서 더욱 필요한 자세이다. 이것은 지혜로운 사회생활을 위해 꼭 지켜야 할 덕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자세를 나는 나보다 한 살 어린 동생, 지순이에게 익혔다. 아니, 여전히 관찰 중이다.


내가 노숙한 건지, 내 주변 사람들이 어린 건지, 이상하리만큼 나와 친한 사람들은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많다. 삶의 경험치가 나보다 오래된 그들로부터 많은 것들을 배운다. 그 영향 탓인지 언제부턴가 작은 하나라도 배울 것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친구로 사귀지 않게 되었다.


대구에서 아티스트 레지던시를 하던 시절 만난 지순이는 서울에서 왔다 갔다 해야 하는 처지가 비슷해서 더 가까워졌다. 책임감이 강하고, 욕심도 잘 차리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이 친구는, 사회에서 만난 사람 중 말이 잘 통하는 친구 중 한 명이다.


그녀는 아무리 친해도 그녀 스스로가 정해 둔 어떤 기준의 ‘선’을 절대 넘지 않는 사람이다. 처음에는 그러한 그녀의 태도가 가끔은 서운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보다 더 지혜롭고 현명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친하다고 해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당연히 여기지 않는 자세. 지순이는 그 누구와도 선을 함부로 넘지 않고 고민해서 예쁘게, 잘, 지키는 사람이다. 아마도 주변에 그녀를 귀여워하고 사랑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가 지순이의 이러한 태도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인생이라는 건 본질적으로 선을 긋는 문제이고, 선을 어디에 그을 것인지는 각자가 정해야 해. 다른 사람의 선을 대신 그어줄 수는 없어. 다른 사람이 정해 놓은 규칙을 지키는 것과 삶을 존중하는 건 같지 않아. 그리고 삶을 존중하려면 선을 그어야 해.”


영국의 화가이자 미술비평가, 소설가인 존 버거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했던 말이다. 지순이가 스스로 정한 선을 긋고,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의 삶을 존중하는 법을 가까이에서 보고 익혀가는 중이다. 그리고 어떤 선을 어디에, 어떻게 그을 것인지, 그 해답은 그녀의 선을 보고 똑같이 베끼는 것이 아닌, 내 안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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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1월, 페리지 아트 스쿨의 감정사회학 연구자 김신식 선생님의 강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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