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과 촌장의 3집 『숲』의 타이틀 곡 “가시나무” 가사 중
상사가 오더를 내린다. 이번 주까지 프로젝트 보고서를 마무리하고 결제를 올리라 한다.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고, 딴 일에 더 집중하다가, 결제해야 하는 날 꾸역꾸역 몸과 머리를 이리저리 회전해가며 보고서를 마무리한다.
내 부하에게 오더를 내린다. 다음 주까지 완료해야 하는 프로젝트를 주기적으로 홍보하고, 굿즈를 만들 업체를 컨택하라고. 내 부하는 나처럼 미루고 미루다가, 프로젝트가 마무리될 때쯤 홍보를 몰아서 하고, 굿즈 제작 업체를 알아볼 것이다.
오더를 내리고 받는 나의 상사, 그 사이의 나, 그리고 부하, 이렇게 세 사람 모두는 내 안에 있다.
1인 기업이라 할 수 있는 순수예술가(시각예술가)인 나는 전시 한 번을 위해 여러 개의 내가 필요하다. 작업하는 나, 홍보하는 나, 수많은 인력과 기획/회의하고 연락하는 나 등등.. 글로만 써도 숨찬 이 일을 어쩌다 보니 10년 가까이 해 오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여러 개의 가면을 쓰고 벗으며 살고 있다. 회사에서의 나, 집에서의 나, 애인과 있을 때의 나, 가족과 있을 때의 나, 등등… 자신을 포함한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 있을까? 단언컨대, 그런 사람은 없을 것이다. 조금씩 다른 가면을 바꿔 써가며 우리는 나를 알고, 타인을 알게 된다. 그리고 어쩌면 그 가면들로부터 어떤 에너지도 얻을 것이다. 마치 부캐(부캐릭터)를 만나 신이 나서 활동하는 유재석, 이효리처럼 말이다.
그림을 그려 벌어 먹고살진 못하지만, 어쨌든 그림을 그리는 직업을 가진 나는 그 일을 하기 위해 여러 개의 부캐릭터가 필요하다. 하루는 상사가 되기도 하고, 다른 날은 부하가 되기도 한다. 가끔은 어느 조직에 속했는지 헷갈려서 가면 밖의 나와 가면 속의 내가 다르게 행동할 때도 있다. 그런 날에는 간혹 나와 만난 사람들이 당황하기도 한다.
석 달 가량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 개인전을 준비하고, 오늘 그 전시가 끝이 났다. 대학의 교양수업처럼 조금 묻어가도 되는 단체전이 아닌, 내 이름 석 자가 온전히 드러나는 인원 몇 안 되는 전공 수업 같은 개인전을 할 때면 신경이 곤두서게 된다. 내 이름이 너무나도 걸려 있으니까.
하나하나 예민하게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다. 전시 준비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나를 열 개 정도로 나누어 쓰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세 명의 조직원(상사, 나, 부하)이 움직이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다. 그럴 때는 새로운 조직원을 탄생시켜야 한다. 그래야만 이 프로젝트를 아름답게 마무리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가끔은 부족한 나의 부캐의 물량에 멘탈과 육체의 붕괴가 될 때가 있지만, 나의 상사께서 정신을 잘 차려 주시어 새로운 조직원을 뽑아 주시면 움직일 만하다. 나의 조직원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지혜롭게 상사의 명령을 잘 이해하고 응용하여, 매년 새롭게 시작되는 프로젝트와 전시를 잘 수행하기를, 내가 나에게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