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에 뭘 그리 넣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읽지도 않을 책, 듣지도 않을 음악, 쓰지도 않을 노트와 필기구들로 가방은 꽤 무거웠다.
버스에 올라탔다. 피곤해서 앉아서 갈까 했지만 자리가 없다. 내 앞의 남녀 커플도 자리를 못 찾고 버스 뒤편에 서서 갔다. 한 정거장쯤 가니 내 앞에 있는 여자 두 명이 일어선다. 자리가 금방 생겨서 다행이다 싶다고 생각하는 찰나, 뒤쪽에 있던 남녀 커플 중에 여자애가 아줌마의 안다리 기술을 쓰면서 빈자리를 파고 들어와 내 앞의 빈자리에 앉았다. 한 자리가 있지만 뻔히 남자 친구가 있는 걸 아는 나로서는 그녀의 옆자리에 앉을 수가 없었다.
자리를 뺏기고 몇 정거장을 더 갔다. 가방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어깨가 저려올 쯤에 반대편 쪽에 자리가 났다. 이번엔 다행히 자리를 잡고 앉을 수 있었다. 앞자리에 앉은 남녀 커플의 분위기가 자못 수상하다. 여자는 창밖만 뚫어져라 보고, 남자는 눈물을 글썽이며 여자를 애처롭게 보고 있다. 난 무슨 영화의 스틸컷인 줄 알았다. 커플은 꼼짝하지 않고 몇 분을 그러고 있다. 아마도 남자가 뭔가 잘못을 했고 여자가 삐친 상황인 듯싶다. 남자는 못나 보이고 여자는 속좁아 보였다. 창밖으로 145도쯤 고개를 돌린 그녀의 목을 잡고 그녀의 남자 친구 쪽으로 확 돌려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남자의 뒤통수를 한대 날려주고 싶었지만 싸우는 커플에 끼어서 잘된 일이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그 역시 참았다.
내 자리를 뺏은 남녀 커플은 뭐가 좋은지 후덥지근한 날에도 껴안은 채 이런저런 수다를 떨고 있다. 내 앞자리의 삐친 커플은 아직도 정지화면이다. 시간이 지나면 삐쳐있는 커플은 어느새 화해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내 자리를 뺏은 닭살 커플로 다시 돌아갈 것이다. 닭살 커플은 지금은 잘 지내지만 조금 이따가는 삐친 커플처럼 또 그렇게 다툴 것이다.
그렇게 싸우고 그렇게 화해하면서 보냈던 사람들이 창밖으로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