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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 있어 줄게

by 조작가

아들에게 점심을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그간 대화하려고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던 차다. 아들이 좋아하는 밥을 같이 먹으면서 대화의 물꼬를 터볼 요량이었다. 그리고 우린 늘 가던 곳에서 점심을 함께 했다.


무슨 고민이 있는지,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물었다. 말을 하지 않는다. 대화를 기다렸으나 되돌아오는 건 무관심과 비난뿐이라는 게 아들의 생각이다.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전달하기도 힘드니, 영어학원 선생에게 자신의 얘기를 들으란다. 왜 나한테 말을 못 하냐 해도 묵묵부답이다. 시선도 마주치질 않는다. 목소리는 잦아들어있고, 금방이라도 울듯한 얼굴이다. 정신없이 소리 지르고 산만했던 게 걱정이었던 아이인데 이렇게 변했다. 무엇이 애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다음날 저녁 아들이 알려준 영어학원 선생을 찾았다. 사무실은 아담했다. 휴일 저녁이니까 수업은 없었을 것이다. 일부러 나를 만나기 위해 사무실에 출근한 모양이다. 그녀는 목동에서 20년 간 아이들을 가르쳤으며 이 동네에서 몇 년째 학원을 운영해 아이들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는 베테랑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본인도 한때는 자녀 문제로 힘들어했었다는 사실도 고백했다. 아들 얘기를 하면서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학교 선생도, 부모도, 동네 주민도 아닌 학원 선생이 눈물을 흘려주는 세상이다. 얘기를 듣다 보니 아들은 영어학원 선생을 거의 엄마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녀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아이가 거의 방치되어 있다. 집에서 저녁을 안 먹고 학원에 와서 햄버거와 라면으로 저녁을 때운다. 그래도 뭔가 해보려고 하는데 잘 안되니 좌절과 무기력증에 빠진 거 같다. 이 동네에 맞벌이 가구의 자녀들 중에는 공부를 포기하고 양아치로 빠지는 아이들도 많지만 아들은 그렇지 않다. 너무 착하다. 몸이 약하고 마음도 약해 공부를 거의 하지 않지만 안 하는 것에 비해 성적은 잘 나오는 편이다. 기본적으로 똑똑한 아이다. 어릴 때부터 케어했으면 전교에서 놀았을 아이다. 하지만 지금 공부보다 더 중요한 건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것이다. 몇 해 전만 해도 아이들과 잘 어울렸는데 지금은 대인기피를 보이고 있다. 아이들이 학원에 없는 걸 확인하고 온다. 자존감과 자신감이 많이 없다. 그리고 불안해한다. 지금 자신의 처지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 같다. 아들은 부모가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훌륭한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런저런 노력도 해봤는데 안 되니 답답해한다. 꼭 한번 병원에 가보기를 권한다. 대체로 아이들 문제는 아이들보다 부모의 문제 때문에 발생한다. 지금 아들에게 필요한 건 부모의 관심과 사랑이다. 아들을 케어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부모님이 신경 써야 한다.


대충 내용은 이랬다. 원래 알고 있었던 것도 있고 새롭게 안 것도 있다. 아들은 지금 무기력과 불안, 대인기피, 자존감 결핍이라는 마음의 병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아들 나이 때 나 역시도 그런 비슷한 것들을 가지고 있었던 듯싶다. 그 근본 원인이 부모의 무관심과 사랑의 결여라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그녀의 말처럼 아들은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늦은 밤 편의점으로 아들을 불러냈다. 한 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눴다. 대체로 영어학원 선생이 말했던 것과 일치했다. 기본적인 상황을 공유하고 그리고 많이 힘들어하는 것에 공감해줬다. 그리고 내 나름의 해법에 대해서도 말해줬다. 아빠가 곁에 있어줄 테니 힘들어하지 말라고... 하고 싶으면 하고,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말라고 했다. 앞으로 평일 이틀 저녁과 주말 점심은 챙겨줄 거라 약속했다. 아빠로서 해줄 수 있는 게 많지 많지만 지금 상황에서 해줄 수 있는 건 해주겠다고 했다. 그러니 믿고 의지하라고. 눈물이 났다. 왜 이 지경까지 상황을 방치했었던가 후회가 밀려왔다. 맞벌이를 안 했었다면, 혹은 가정이 더 평화로웠다면 조금 더 나았을까? 앞으로도 더 힘든 일이 많을 텐데 어떻게 살려고...


다음날 라디오헤드 카피 밴드에 연락했다. 하루 만에 번복해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다행히 내 상황을 충분히 이해해줬다. 말이 이렇게 통하는 밴드를 만나기도 어려운데 어쩔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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