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를 길러보겠다고 밴드 단톡에 말하자 밴드에서 보컬을 담당했지만 노래를 못 불러 지금은 다른 밴드에서 베이스기타를 치고 있는 후배가 "고양이랑 형이랑 왠지 잘 어울릴 거 같아요"라고 말했다. 내가 "왜"라고 묻자, "음악 들을 때 고양이가 곁에 있으면 그림이 좋아 보여서요"라고 말했다. 나는 "책 읽을 때나 글 쓸 때 고양이를 곁에 두려고 하는데"라고 말했고 그러자 우리 팀에서 건반을 쳤지만 지금은 밴드 활동을 하지 않는 친구가 "헤밍웨이네"라고 받아줬다.
며칠 뒤 치즈 빛깔을 띤 브리티쉬숏헤어 한 마리를 데리고 왔다. 이름을 무엇으로 지을지 고민했다. 후보는 '스노우볼', '물루', '뮤즈'였다. 그런 이름을 생각한 이유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키운 고양이 이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노우볼'도 '물루'도 '뮤즈'도 아닌 '영심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세련된 이름도 좋지만 우리 집 애들의 '영'자 돌림으로 이름을 지어준 것은 가족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였다.
1. 스노우볼
헤밍웨이는 대단한 사람이다. 항상 '스노우볼'을 곁에 두고 글을 썼으니 말이다. 헤밍웨이는 '스노우볼'이 타자기 위에 올라가더라도 혼내지 않았다고 한다.
헤밍웨이는 1931년부터 1938년 플로리다 주 키웨스트에 살았다. 1935년에 친구 스탠리 덱스터 선장이 고양이 한 마리를 선물해줬다. 그 고양이가 바로 '스노우볼'이다. '스노우볼'은 발가락이 여섯 개가 있던 다지증 고양이였는데 그 후 사람들은 다지증 고양이를 '헤밍웨이 고양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헤밍웨이는 고양이를 너무 사랑해서 마당까지 개조해 '스노우볼'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게 해 줬다. 1961년 헤밍웨이가 자살한 후 키웨스트의 집은 헤밍웨이 박물관으로 바뀌었고 그곳엔 60여 마리의 고양이가 집을 지키고 있는데 그 절반이 다지증 고양이라고 한다.
2. 뮤즈
고양이 사랑은 하루키도 빠질 수 없다. 하루키는 20대 중반 갑작스럽게 결혼을 해서 돈이 필요했다. 재학 중이고 취업이 어려웠던 때에 이곳저곳에서 돈을 빌려 재즈 카페를 열었는데 '피터캣'은 그 재즈바 이름이다. 하루키는 어릴 때 '뮤즈'라는 고양이를 키웠었다. <장수 고양이의 비밀>에서 하루키는 이렇게 말했다.
출산하는 고양이와 한밤중에 몇 시간씩 마주하고 있던 그때, 나와 그 애 사이에는 완벽한 커뮤니케이션 같은 것이 존재했다고 생각한다. 지금 여기서 어떤 중요한 일이 벌어지는 중이고, 그것을 우리가 공유한다는 명확한 인식이 있었다. 언어가 필요하지 않은, 고양이니 인간이니 하는 구분을 넘어선 마음의 교류였다. (140p)
하루키는 고양이와 마음이 통했었다. 그런 고양이가 떠날 때는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이 책은 개인적으로 작년 여름 세상을 떠난 우리 집 장수 고양이 뮤즈의 영혼에 바치고 싶습니다. 책에 실린 글을 쓰고 몇 달 뒤, 뮤즈는 고요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생후 육 개월의 뮤즈가 기묘한 인연으로 고쿠분지의 우리 집에 왔을 때 저는 아직 스물여섯 살이었습니다. 그때는 내가 언젠가 소설가가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지평선 위로 조금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 뒤로 뮤즈는 거의 항상 제 곁에 있으면서, 기구하다면 기구한―닥치는 대로라면 닥치는 대로인―저의 좌충우돌 인생을 시큰둥한 곁눈질로 쿨하게 지켜봤습니다. 뮤즈가 그러면서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상상도 안 됩니다. 고양이의 마음은 정말이지 모를 일이지요. 어쨌거나 무슨 일이든 불평 한마디 없이, 잇따른 이사도 터프하게 버텨준 이 신비롭고 현명한 암고양이에게 소박한 마지막 인사를 건넵니다. 뮤즈의 영혼이여, 평안히 잠드소서. 나는 아직 좀 더 애써볼 테니까. (336~337p, 「후기」에서)
고양이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인지 <해변의 카프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태엽 감는 새>, <양을 둘러싼 모험>, <중국행 슬로보트>,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고양이가 등장한다.
3. 물루
장 그르니에의 <섬>의 '고양이 물루'편은 어린 고양이 한 마리를 데려와 사랑하다가 이사를 가게 되어 불구의 몸이 되어 버린 고양이를 동반할 수 없는 처지가 되자 그를 안락사시킨다는 내용이다. 사랑하는 존재가 겪는 고통은 당사자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더 견디기 힘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없애는 것도 사랑일 테고 그 고통을 옆에서 지켜보는 고통 또한 사랑일 것이다. 장 그르니에는 전자를 선택한다. 장 그르니에는 개나 고양이를 12프랑을 받고 죽여주는 수의사 쎄르벡씨에게 물루를 맡기기로 결심하면서 짐승의 생명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특권이 인간에게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본다.
불행한 존재들에 대한 이른바 연민 때문이라지만 사실은 그 존재들의 비참한 모습을 눈으로 보지 않기 위해 우리는 그들의 죽음을 바라는 것이다. 또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당사자보다도 더 감수하기 어려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62)
고양이를 키운 사람은 알 것이다. 고양이가 잠이 얼마나 많은지. 장 그리니에는 물루의 잠을 침묵의 세계에 드는 것으로 보았고 첫사랑만큼 믿음 가득한 것이라고 했다.
짐승들의 세계는 침묵과 도약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짐승들이 가만히 엎드려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때 그들은 대자연과 다시 접촉하면서 자연 속에 푸근히 몸을 맡기는 보상으로 그들을 살찌게 하는 정기를 얻는 것이다. 그들의 휴식은 우리들의 노동만큼이나 골똘한 것이다. 그들의 잠은 우리들의 첫사랑만큼이나 믿음 가득한 것이다.(32)
장 그리니에는 물루를 통해 세상과의 거리감을 좁혔고 불안감을 달랬다.
오후에는 침대 위에 가 엎드려서 앞발을 납죽이 뻗은 채 가르릉 거리는 소리를 내며 잠을 잔다. 이제는 흥청대며 한바탕 놀았으니 아침 일찍부터 내게 찾아와 온종일 이 방에 그냥 머물러 있을 것이다. 이때다 싶은지 여느 대 같지 않게 한결 정답게 굴어 댄다. 피곤하다는 뜻이다. 나는 그를 사랑한다. 물루는, 내가 잠을 깰 때마다 세계와 나 사이에 다시 살아나는 저 거리감을 없애 준다(36)
황혼 녘 대낮이 그 마지막 힘을 다해가는 저 고통의 시각이면 나는 내 불안감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고양이를 내 곁으로 부르곤 했다. 그 불안감을 누구에게 털어놓을 수 있으랴? "내 불안을 달래 다오"하고 나는 그에게 말하는 것이었다(36)
4. 영심이
'영심이'는 내가 책을 읽을 때 가끔씩 내 곁으로 온다. 아는 체를 하면 또 도망가버린다. 다시 책을 읽으면 또다시 와서는 말없이 있다가 어느새 또 사라진다. 열심히 글을 쓸 때가 다 와서는 또 조용히 사라진다. 영심이가 헤밍웨이의 스노우볼, 하루키의 뮤즈, 장 그리니에의 물루처럼 작가의 고양이 반열에 못 오르리라는 법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