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좋아하는 동물도 없고 식물도 없다. 애지중지 동물을 키우고 식물을 키우는 사람을 보면 다른 나라 사람처럼 보인다. 아직도 난 노란색은 개나리고 빨간색은 진달래로 알고 있다.
화분이 생겨도 채 한 달을 넘기지 못한다. 물을 많이 줘서인지 아니면 반대로 물을 적게 줘서인지 모르지만 내 손에 들어온 화분은 금방 시든다. 초등학교 때 학교 앞에서 팔던 병아리도 3일을 넘기지 못하고 죽였다. 닭으로 키우는 친구도 있었는데 그들은 외계인임이 분명하다. 올챙이를 개구리로 키운 친구는 못 봤지만 그렇다고 하루 만에 죽이진 않는다. 언젠가 우리 집에 강아지 한 마리가 생긴 적이 있었다. 가족들 모두 신기해했지만 그뿐이었다. 겨우 3일을 넘기지 못하고 죽이고 말았다. 그날 이후로 우리 가족은 생명체를 키운 적이 없다.
초등학교 1학년(1학년 즈음으로 기억한다)은 내가 생명을 키우지 않겠다고 한 결정적 사건이 일어나던 때다. 초등학교 1학년 즈음 우리 집에 참새가 둥지를 틀고 살았었다. 참새 둥지를 본 동네 형이 참새 둥지에 올라 참새 한 마리를 꺼냈다. 동네형은 그 참새를 가지고 놀았는데 나는 그게 너무 가지고 싶었다. 우리 집 둥지에서 나온 참새이니 그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참새를 가지고 싶었다. 하지만 잡은 사람이 임자라고 우겨도 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마침내 나는 아이의 최대 무기인 울음을 동네형이 둥지에서 참새를 꺼내는 순간에 터뜨렸다. 어른들의 중재로 나는 참새를 양보받았다. 동네형은 나에게 '다음에 만나면 너 죽어'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두려움보다는 기쁨이 컸다. 기어이 참새를 양보받은 나는 힘들게 얻는 것인 만큼 참새에게 이불도 덮어주고 먹이도 주면서 잘 키우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참새는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2층 다락에서 내려오는 내 발에 밟혀 죽고 만 것이다. 허무하게 죽은 그 참새를 나는 동네 꼬마들을 불러 양지바른 곳에 무덤을 만들어 묻어주고 핫도그 바로 십자가를 만들어 꼽아주고서는 묵념까지 해줬다. 그리고 나는 그 뒤로는 다시는 어떤 생명도 키우지 않았다.
얼마 전에 나에게 화분이 하나 생겼다. 햇빛도 주고 먹다 남은 물도 간간히 줬다. 그리고 가끔씩 먹다 남은 커피도 주고 녹차도 줬다. 화분이지만 물만 먹고살 수는 없다. 차도 한 잔씩 해야 하지 않은가.
그리고 며칠 뒤 화분은 금세 수척해졌다. 왜 내 손에 들어온 생명체들은 오래 버틸지 못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