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회의는 우리 조직에 큰 변화를 가져올 중요한 건이었다. 반드시 성사시켜야 하는 일이었다. 우리는 회의를 앞두고 작전을 짰다. 하나도 준비 안 한 것처럼 대응하는 것이 우리의 작전이다. 하지만 우린 그 중요한 회의를 위해 며칠 전부터 철저하게 자료 준비를 했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그날 예상보다 많은 인원이 우리 사무실을 찾아왔다. 그들이 우리 상황을 면밀(綿密)하게 파악하려는 의도임을 알 수 있었다. 그에 맞서 우리도 물량공세(머릿수)로 맞섰다. 처음엔 가벼운 인사부터 시작했고 본격적인 게임에 들어가기 전에 날씨와 같은 가벼운 소재의 몸풀기가 이어졌다. 그리고 중요한 타이밍에 우리는 준비한 대로 '따로 준비한 건 없지만 그전에 만들어 놓은 게 있는데 그거라도 보면서 얘기할까요?'라며 다소 어색하게 운을 뗀 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준비라도 하는 거였는데 죄송합니다'라며 더 어색하게 자료를 프린트하고 복사하는 등 부리나케 준비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그리고 철저하게 준비한, 준비되지 않아 보이는 발표를 했다. 발표는 잘 끝났고 그들도 '예기치 않은' 발표를 잘 들어주었다.
학창 시절에 시험을 앞두고 친구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어제 잠만 잤어'이다. 그 말을 들은 몇몇 친구가 '난 어제 놀았어'라고 화답한다. 여기서 한 술 더 떠 '어제 테레비(텔레비젼)만 봤어'라고 하는 친구도 있다. 그리고 궁금해하지도 않은 드라마 줄거리를 어젯밤 공부는 안 하고 테레비만 본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친구들에게 쫙 펼쳐 놓는다. 하지만 '잠만 잔' 친구의 성적은 매번 좋았다. 밴드에서도 마찬가지다. '연습 하나도 안 했어'. '나도 이번 주 바빠서 하나도 못했는데'라고 말하지만 막상 합주를 하면 그렇지 않다. 연습을 하나도 안 했다고 할 수 없는 합주가 끝나고 나면 나머지 멤버들은 '그럼 연습하면 얼마나 잘하는 거야'라고 맞받아 준다. 바둑 대국에 앞서 꼭 하는 말이 있다. '컨디션이 별로네'라든가 '공부 하나도 안 했는데'라든가 하는 말이 그것이다. 하지만 대국 내용을 보면 열심히 준비했다는 걸 알수 있다.
발표를 위해서, 합주와 대국을 위해서 열심히 준비했다는 사람은 여태까지 단 한 사람도 만나보지 못했다. 왜 사람들은 중요한 순간에 마치 하나도 준비 안 한 것처럼 행동할까? 준비를 안 했으면 그냥 혼자 알고 있지 왜 그걸 또 자랑삼아 말하는 걸까? 우선은 상대방에게 경계심을 풀어주려는 의도가 있다. 시험이나 대국은 상대와 경쟁하는 게임이다. 특히 대국이 그렇다. 먼저 대국 전에 준비가 안 된 것처럼 말함으로써 상대방의 전투력을 떨어뜨리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 두 번째는 이러한 엄중한 상황에서도 대비를 하지 않는 대범함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이런 것쯤이야' 하는 허세이기도 하다. 기대치를 낮춰주는 데도 효과가 있다. 준비를 안 했으니 못해도 비난하지 말라는 사전 포석인 셈이다. 그러니 '하나도 안 했어'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크게 낭패 보기 십상이다.
하지만 '하나도 안 했어'라는 말은 곱씹어 볼만한 데가 있다. '하나도 안 했어'라는 말은 남을 의식하는 말이다. 내가 준비를 했건 안 했건 그건 내 문제일 뿐이다. 상대방이 알아야 하는 건 아니다. 실패를 하면 퇴로가 필요한 데 '하나도 안 했어'는 좋은 핑곗거리이자 퇴로가 된다. 우리는 왜 열심히 준비한 것에 대해 이토록 부끄러워할까? 실패할 수도 있지만 열심히 준비한 과정 자체는 훌륭한 것 아닌가? '하나도 안 했어'라는 말은 과정보다는 결과를 더 중요시 여기는 문화의 산물에서 나온 말인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