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기다렸던 책장이 왔다. 2.4미터에 6단짜리 철제 책장이다. 책장을 들여놓기 위해 그동안 가족들을 설득하느랴 무던 애썼다. 특히 '소파 선생'인 애엄마와 소파에 앉아 TV 보는 것을 지상 최대의 낙으로 아는 딸을 설득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애엄마에게는 소파에 누우면 허리에 안 좋다는 걸 강조했고 딸에게는 수험생 처지라는 걸 지속적으로 상기시켰다. 아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식이었다. 그 나이 남자들은 세상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다. 지리한 1대 2의 싸움은 계속됐다.
일은 엉뚱하게도 쉽게 풀렸다. 소파가 허리에 안 좋다는 걸 알게 된 건지, 아니면 소파를 치우고 책상을 놓은 집이라도 가봤는지 애엄마는 어느 날 소파를 치우고 책상을 들여놓자고 선언했다. 어떤 변화라도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아무튼 난 그 이유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틈을 노려 책장도 놓자고 제안했다.
내가 책장을 원한 이유는 간단하다. 그동안 사 모은 책이 너무 많아 수납할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7개의 책장에 2열 주차까지 했지만 더 이상 책을 놓을 공간이 없었다. 물건들이 그렇게 쌓아두니 보고싶은 책을 찾기 힘들었다.
소파를 치우고 책장과 책상을 들여놓자마자 나는 며칠 동안 책 정리를 했다. 아들방, 딸방, 안방, 거실에 흩어져있는 책장에 책을 새로 들여온 책장에 정리했다. 고전은 고전대로 작가별로 정리했고 최근에 읽은 경제경영서 코너도 만들었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몇 가지 변화가 생겼다.
우선 책이 한눈에 들어왔다. 두 권이나 있는 책이 다섯 권이나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이제 보고싶은 책을 한눈에 찾을수 있게 됐다. 책이란 여타 물건처럼 쌓아두는 물건이 아니다. 언제라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가지런히 놓여있어야 한다.
가장 큰 변화는 가족 간에 대화가 늘었다는 거다. 소파 없는 삶이 과연 가능할까 의구심이 들었었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TV를 보면서 밥과 간식을 먹는 문화를 쉽게 바꾸기란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막상 소파를 치우고 보니 이 모든 게 쓸데없는 기우였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TV에 시선을 박는 대신 이제는 책상을 마주 보고 앉아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분위기도 바뀌었다. 책장과 여유 공간에 화분을 놓아 분위기를 화사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그전보다 부지런해지고 스마트해졌다. 나는 책상과 책장을 보면서 딸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소파는 사람을 게으르게 만들지만 책상은 사람을 부지런하게 만들고 TV는 사람을 바보로 만들지만 책장은 사람을 똑똑하게 만들어줘"
책장과 책상이 있으니 독서가 일상화됐고 업무와 일을 보기 위해 굳이 카페에 나가지 않아도 됐다. 그리고 난 책장과 책상을 보면서 <화양연화>의 양조위처럼 소설을 쓰고 싶어졌다는 생각도 들었다.
또 다른 변화는 집이 넓어진 것이다. 공간이 넓어지자 물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책장이 아닌 곳에 마구잡이로 올려놓은 책을 치우니 책 속에 파묻힌 물건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공간의 변화는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안방에 있는 서브 오디오 위에 온갖 책과 물건들을 치우니 오디오도 들을 수 있게 됐다. 10년 넘게 한 번도 듣지 않은 턴테이블에 그토록 찾았던 비틀스 앨범이 있는 것도 이번에 알게 됐다. 거실은 음악 감상하기 좋은 카페가 됐다. 거실에 있는 메인 오디오에서 나오는 소리는 소파가 있었던 때와 달리 들렸다. 깨끗하고 정돈된 상태에서 듣는 음악이 훨씬 좋다. 소리는 공간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새로 들어온 책장에 아들방과 딸방에 있는 책을 모두 옮기고 비워진 책장을 아들과 딸에게 물려줬다. 아들과 딸이 책과 자신의 방에 어지럽게 놓여 있는 물건을 비워진 책장에 수납하니 방은 그만큼 넓어졌다.
거실의 여유 공간이 있어 아들방 베란다에 있는 옷도 거실에 새로운 행거를 들여놔 그곳에다 정리했다. 그렇게 옷을 치우자 항상 덥고 답답했던 아들방이 환기가 잘됐다. 원래 환기가 잘 되는 곳을 잡다한 물건들이 막고 있었던 것이다.
봄에 괜히 가구를 이리 옮기고 저리 옮기는 게 아니다. 공간의 변화는 곧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삶의 변화가 필요하다면 공간을 변화시키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