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행을 떠나는 할머니들
매진될뻔한 기차 티켓을 겨우 예매할 때부터 오늘을 직감했다. 엄청난 인파가 플랫폼을 가득 채웠다. 명절을 방불케 했다. 대부분 큰 캐리어 가방 하나씩을 들고 어디론가 떠나는 커플, 가족, 단체 모임 들이다. 일하러 가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다. 일하는 나와 여행을 떠나는 그들 사이엔 아무런 연관성은 없다. 나는 나고 그들은 그들일 뿐이다. 하지만 수많은 여행객 덕분에 난 늘 즐기던 커피를 마시지 못했다. 기차여행(기차를 타고 일하러 가는데 기차여행이라는 단어를 쓸 수밖에 없다. 기차일이라는 단어가 없기 때문이다)의 필수품 하나를 꼽으라면 나의 경우는 단연 커피다. 기차여행에 빠질 수 없는 필수품이 또 하나 있다. 김밥이다. 김밥집은 덜 붐벼 꼬마김밥을 겨우 먹을 수 있었다.
기차 안은 더 붐볐다. 입석 티켓을 끊은 사람들이 객실 여기저기에 서 있어 복잡함이 더 했다. 거기에 내 주위에 할머니 몇 분이 계셨는데, 출발 전부터 시장을 방불케 소란을 떨더니 기차가 움직이면서 소란이 절정에 달했다. 역방향이 불편하다며 자리를 돌리네 마네 한참 부산을 떨더니 기어이 사람을 불러서는 자리를 돌려달라고 사정을 했다. 담당자는 KTX의 자리를 돌리지 못함을 설명했다. 하지만 할머니들의 여전히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내 담당자의 설명에 수긍한 할머니 중에 한 분이 선글라스를 쓰면 덜 어지럽다는 사실을 무슨 신대륙 발견한 것처럼 주위 할머니에게 전달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그 자리를 떴을지도 모른다. 선글라스를 낀 할머니들은 이번엔 옛날 기차 여행의 추억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기차 탈 때마다 옆자리에 예쁜 여성분이 앉기를 기도하지만 이제는 기도를 바꿔야겠다. 조용하기만 해 주세요라고
2. 학생들이 보인다
수업 한지 석 달이 됐다. 확실히 많이 편해졌다. 이런저런 나의 농담에 아이들이 재밌어한다. 수업 진행의 요령도 붙었다. 문제 힌트를 줄 듯 말 듯 밀땅도 하고, 토론 수업도 그럭저럭 이끌었다. 뭐든 하면 할수록 편해지는가보다. 무엇보다도 학생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에 적힌 나의 생활태도 기록을 보고 늘 궁금했었다. 선생님들은 어떻게 나를 포함하여 8,90명의 아이들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었을까? 그 어린 내가 책임감이 강한지 어쩐 지를 어떻게 보았을까? 의심했다. 아마 대충 썼을 거야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런데 내가 막상 그 자리에 있고 보니 알겠다. 3,40명의 아이들을 석 달가량 보니, 각 학생들의 특성이 보인다.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 친구들과의 대화, 표정, 질문하는 모습만 봐도 그 아이의 책임감, 성실함, 교우관계가 보인다. 앞으로 공부를 잘 할거 같은지, 못할 거 같은지도 대충 알겠다. 미래에 이성친구를 만난다면 어떻게 할지도 보인다. 무뚝뚝한 남자 애도 있고, 여우 같은 여자 애도 있다.
잠시 만나는 학원 선생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조심했다. 나의 한마디 평가가 학생들에겐 평생 갈 수 있고 그들의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나의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이 나에 대해 책임감이 강한 아이라고 썼던 것은 사실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런 평가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걸 부인하기 힘들다.
3. 무뚝뚝한 여자
마지막 수업이 끝나고 정리할 때 즈음 무척 아름다운 여자가 학원에 들어왔다. 두리번 하더니 학원 원장인 여동생을 찾아 인사를 했다. 학부모라고 하기에는 너무 젊었다. 젊다고 학부모가 아닌 건 아닐 터지만. 그 여자는 미모가 출중했다. 학부모는 학부모다운 외모가 있다. 여동생이 학원에서 같이 일하는 남동생의 여자 친구라고 귀띔해줬다. 원피스에 캐리어 가방을 끌고 있던 그 여자는 여동생에게 인사를 하고 미끄러지듯 학원을 나섰다.
마무리 정리를 하고 학원을 나서 역으로 바삐 움직였다. 역으로 가는 중간쯤에 학원에서 만난 그 여자를 발견했다. 그녀도 역으로 가는 모양이다. 말을 걸까 말까 고민했다. 동생의 여자 친구라고 해서 형이 꼭 아는 체를 할 필요는 없다. 더구나 역까지 가려면 10분이나 걸리는데 처음 보는 여자랑 10분간 대화할 자신도 없었다. 걸음걸이를 조금 늦추어 그녀를 뒤따라 갔다. 좋은 타이밍이 생기면 말을 걸고 그렇지 않으면 그냥 가자라고 생각했다. 좋은 타이밍은 금방 왔다. 역 앞 계단 앞에서 그녀가 캐리어 가방을 들고 어쩌지 못하는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나는 아까 학원에서 봤던 사람이고, 내가 당신의 남자 친구의 형이라고 소개하고선 캐리어 가방을 들어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에 올라, 형으로써의 최소한의 질문이라 생각하며 그녀에게 동생과 얼마나 사귀었는지를 물었다. 그녀는 동생과 1년 반 사귀었다고 답했다. 연애 1년 반이라면 결혼을 생각할만한 기간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우리 가족이 될지도 모른다. 몇 가지 질문을 통해서 그녀가 전문 강사이며, 동생이 운영하는 학원을 돕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큰 캐리어 가방을 들고 있길래 강사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날 그녀의 분위기는 학원 강사보다는 영락없는 스튜어디스였다. 그녀는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SRT를 탄다고 했다. 집이 강남 쪽인 모양이다. 우리의 어색한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KTX나 SRT나 C 역은 플랫폼이 하나밖에 없는데도 우리는 서둘러 각자의 길을 갔다. 그녀 입장에서 내가 어색하고 불편했을 것이다. 그녀는 내가 가방을 들어준 것에 대해 고맙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차에 몸을 실을 때 알았다. 남자 친구의 형이라면 뭔가 잘 보이려고 할 텐데 전혀 그러지 않았다. 결혼까지는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다.
다행히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는 조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