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욕이 없는 편이다. 특히 잡화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구두와 혁대는 대충하고 다니고 지갑도 해진 지 오래다. 가방은 편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어느덧 나에게도 좋아하는 물건이 생기기 시작했다. 애장품(여기서의 애장품은 손에 들고 다닐 수 있는 것으로 한정한다. 홈 오디오 세트처럼 크고 고가의 물건, 책, CD 등 콘텐츠는 제외한다)이라고 해야 하나. 그것도 특정 브랜드 것만 쓴다. 다 오래된 물건이다. 여기서 말하는 오래됐다는 의미는 내가 오래 쓰기도 했지만 사람들이 오래전에 써왔는데 최근엔 잘 안 쓰는 물건을 의미한다.
1. 만년필
글씨는 못쓰는데 만년필은 좋아한다. 영화 <동주>에서 윤동주 시인이 원고지와 종이에 만년필로 시를 쓰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을 본 사람이라면 만년필의 매력을 느꼈을 것이다.
가성비 좋은 만년필을 좋아한다. 2,30만 원대의 중가의 만년필도 써봤지만 편하게 쓰기에 라미(LAMY)만한 게 없다. 만년필은 주로 필사할 때와 인터뷰 시 필기용, 미팅할 때 메모용으로 쓴다. 그렇기 때문에 오래 써야 하고 만년필의 그립감이 좋고 오래 버틸 수 있는 재질이면 충분하다. 대충 눈에 띄는 종이에 필기를 하기 때문에 좋은 만년필을 쓸 필요가 없다. 만년필의 역량은 종이의 질에서도 나오기 때문이다. 고가의 만년필은 써 본 적이 없어서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좋은 종이를 사용하지 않을 바에야 중고가 만년필이나 저가 만년필이나 큰 차이는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내가 만년필을 쓰고 있으면 "어머 이런 것도 쓰세요" 하면서 놀랜다. 오래된 물건을 쓰는 사람을 처음 본다는 표정이다. 언젠가는 기업 인터뷰를 할 때 만년필을 쓴 적이 있었다. 인터뷰가 끝나자 인터뷰이가 나에게 "라미 쓰시네요"하면서 기업용 선물이라며 라미 만년필을 챙겨줬다. 오래된 물건을 서로 알아봤다고 하는데에서 오는 동질감 같은 걸 서로 느꼈다.
대개 만년필을 쓰는 사람들은 한 두 자루만 가지고 있지 않고 몇 자루씩 가지고 있다. 혹시나 하고 친구들에게 선물해볼까 생각해봤지만 묻지 않아도 뻔한 대답이 나올 거 같아 포기했다.
"손편지도 안 쓰는데 그걸 어디다 쓰려고"
2. 아날로그시계
요즘 시계 차는 사람 별로 없다. 스마트폰이 워낙 좋기도 하고 혹시 시계를 찬다 해도 디지털 시계지 아날로그시계를 차고 다니지 않는다. 나는 아날로그시계(Calvin Klein k2247101)를 수 십 년째 차고 있다. 화이트 메탈로 깔끔하고 스마트해 보여 좋다. 그동안 스크래치도 많이 났고 시계줄도 고장 나 교체했고 배터리도 자주 나가고 여름엔 땀이 차는 등 아날로그시계 특유의 불편함을 주는데도 난 좋다.
내 시계를 보고 좀 특이하다고 생각했는지 시계가 예쁘다고 말해 주는 사람도 있었다. 최근엔 아예 아무도 눈길도 주지 않는다. 그래도 난 중요한 미팅이나 행사가 있을 땐 넥타이를 매는 대신 눈에 잘 띄지도 않는 만년필을 챙기고 시계를 찬다.
3. 종이 신문
종이 신문 구독률이 10%대다. 거의 종이 신문을 안 본다는 얘기다. 오래된 물건의 대표적인 아이템이다. 다니는 회사가 스마트폰 제조사나 항공사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스마트폰을 공짜나 할인해서 받을 수 있고 항공권도 싸게 받을 수 있으니까. 신문사에 다녀서 좋은 건 마음껏 신문을 읽을 수 있다는 거다. 하지만 한 달에 2만 원 하는 신문을 마음껏 읽는다고 좋을 건 없다. 더구나 내가 쓴 글은 안 읽게 되는 심리 같은 게 작용해 종이 신문은 잘 안 보게 된다. 신문사에서 일하는 나도 이러는데 일반인들은 얼마나 종이 신문을 보지 않을까?
기업 인터뷰를 하고서 종이 신문에 기사가 실리게 되면 인터뷰이에게 그 사실을 알려준다. 종이 신문에 자기 기업이 나가는 걸 좋아하면서 그들이 나에게 묻는 질문은 나를 몹시 당황스럽게 만든다.
"신문 어디서 사요?"
"아마 편의점에 있을 거예요"
오래된 물건을 넘어 잊힌 물건, 사라진 물건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4. 향수
의외로 향수 쓰는 남자다. 오래전부터 불가리 블루를 써왔다. 파란색 병에 들어 있어서 보기에도 기분 좋다. 중요한 미팅이나 모임에 갈 때 정도만 향수를 쓴다. 그러다 보니 동료와 후배들이 내가 향수를 바르면 "오늘 외근 있어요?"라고 묻는다.
얼마 전에 인터뷰이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향수 쓰세요?"
"네"
"무슨 향수예요. 좋은데요. 저도 써보려고요"
"불가리 블루예요"
내가 지금 쓰는 향수는 유통기한이 훨씬 지난 향수다. 진짜 오래된 물건이다. 유통기한이 훨씬 지났는데도 아직 반이나 남았다. 아직 향기는 그런대로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