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는 우리 회사와 업무 협력 관계에 있는 회사의 대표다. 얼마 전 A 소속 회사의 B와 그리고 부서에서 같이 일하는 후배 C와 함께 자리를 만들었었다. 자리를 만들게 된 것은 B와 C가 오래전부터 같이 알던 D 때문이었다. 한 다리 건너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좁은 세상이다. 서로 아는 사이인 것도 놀라운데, B와 C와 D의 족보를 따져보니 모두 나이가 같았다. 그 자리에서 세 명은 친구로 지내자는 결의를 하게 됐다. 물론 '빠른' 생일자가 끼어있어 문제가 없진 않았지만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빠른'까지 따지지 말자는 대승적 차원의 결단이 내려졌다. 친구가 됐으니 말을 놓는 건 당연지사. 나 빼고 모두 친구가 된 세 명 덕분에 훈훈한 술자리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 A와 내가 동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며칠 후 A와 술자리를 갖게 됐다. A는 나와 그가 서로 동갑이라는 얘기를 B로부터 들었는지 나이가 같으니 친구로 지내자고 했다. 이미 B, C, D가 친구로서 말을 놓기로 한 이상 나도 A와 말을 안 놓을 수가 없게 됐다. 나중에 E가 자리에 참석하게 됐는데, E는 우리 회사와 A 소속 회사와 협업하는 회사의 대표다. A와 E는 이미 말을 놓고 지내는 사이다. A와 친구가 된 이상 A와 서로 말을 놓는 E에게 존댓말을 쓸 수 없는 노릇이다. 결국 나는 E와도 말을 놓게 됐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게 선배나 후배들과는 편하게 말을 놓기가 쉽지 않다. 회사 후배인 C에게는 말을 놓지만 C와 친구가 되어 말을 놓게 된 B와 D에 대해서는 말을 놓기가 쉽지 않다. 여자 선후배에게도 말을 잘 놓지 못한다. 유독 나이가 같은 남자들에게만 말 놓기가 편하다. 아마 동갑 남자들끼리 말을 놓음으로써 그들끼리 친밀함을 과시하려는 것일 것이다. 인맥 차원에서 본다면 연락하는 사이보다는 밥 먹는 사이가 더 친밀하고, 밥 먹는 사이보다는 언제든 상담할 수 있는 사이가 더 친밀하고, 언제든 상담할 수 있는 사이보다 말을 놓는 사이가 더 친밀하다. 그리고 그러한 친밀함을 다른 사람에게 보임으로써 두터운 인맥을 자랑할 수도 있다. 어쩜 조금 더 발전된 비즈니스 관계가 형성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난 쉽게 말을 놓는 스타일은 아니다. 더구나 비즈니스 관계로 만난 사람에게 말을 놓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어찌해서 말을 놓기는 했지만 자리가 불편하고 나중에 이들을 어떻게 만나야 할지도 막막했다. 하여간 이미 말을 놨으니 다시 높일 수 없는 노릇이다.
말을 다시 높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편안하게 놓지도 못하고 어정쩡하다보니 아예 말을 안 하게 된 것이다. 어설프게 말 놓기가 불러온 참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