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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배속

by 조작가

드럼 선생은 나에게 가혹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입시생 전문가인 그의 레슨은 초지일관 느린 속도로 연주하기다. 그는 느린 속도에서 근육을 단련시켜야 원곡을 제대로 연주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원곡 속도가 100 bpm이면 메트로놈을 50 bpm에 맞춰놓고 연주를 시작한다. 만약 0.5 배속에서도 연주를 못하면 속도는 더 내려간다. 0.5배속에서 익숙해지면 점차 속도를 올리고 원곡을 0.7, 0.8, 0.9 배속으로 재생해 놓고 노래에 맞춰 드럼을 연주한다. 이 방식은 선생 말대로 꽤 가혹하고 고통스럽다. 느린 속도에서 연주하는 게 더 정확하게 연구해야 해서 어렵다. 대충 칠 수가 없다. 원곡 속도로 연주하고 싶은 충동도 강렬하게 느낀다.

나는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과 다른 속도의 시간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남들이 1년을 12달 산다면 난 11달이나 10달쯤 사는 느낌이었다. 지구의 공전 속도가 나에게만 달랐던 것이다.

그렇게 얘기할만한 증거가 있다. 학교를 1년 일찍 들어간 탓도 있지만 신체 발달이 친구들보다 항상 느렸다. 초등학교 때는 여자아이들보다 달리기를 못했고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이불에 지도를 그렸다. 어릴 때부터 동안 소리를 들었는데 친구네 집에 가면 친구 어머니가 후배를 데리고 왔냐고 물을 정도였다.(동안에 대한 에피소드는 너무 많지만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공부에 대한 이해력도 꼭 한 템포씩 느렸다. 배울 때는 아무리 해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1,2년 뒤에는 이해가 되곤 했다. 담배나 술도 늦게 배웠고 여자 경험도 친구들에 비해 한참 늦었다. 친구들에게 어린아이 같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고 순진하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학창 시절만 그런 게 아니다. 사회에 나와서도 남들보다 늦게 시작하고 돈, 인생, 친구, 사업 등에 대한 깨달음도 항상 늦었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주인공이 다른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있다. 그가 그 시간에서 벗어나자마자 자신을 제외하고 원래 자신이 살던 세계의 시간이 훌쩍 지나버린 것을 보고 절망에 빠진다. 나는 내가 꼭 인터스텔라의 그 주인공 같았다. 친구들이 20살일 때 나는 18살이나 17살이었고 친구들이 50일 때 나는 40에서 45쯤 어딘가에 살고 있는 거 같다. 한참 앞서 있는 친구와 한참 뒤에 있는 나 사이에는 어느덧 좁힐 수 없는 시간의 간극이 존재해 버렸다. 같이 산다는 건 같이 늙는다는 걸 의미한다. 거꾸로 인생을 산 벤자민 버튼은 결코 행복한 인생을 산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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