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 디자이너, 택시 기사, 헬스 트레이너와 사소한 대화를 나눴다. 이곳에 이렇게 기록할만한 내용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세상에 사소한 것은 없다. 수 천 년 전, 혹은 수만 년 전 누군가 그린 낙서는 인류 최고의 작품이 되어 후세에 전해오지 않는가 말이다. 그러니 나의 지금의 기록이 수 천 년 후, 혹은 수만 년 후에 인류의 소중한 일상을 담은 글로 역사에 남아 전해질지 모를 일이다.
3,4년 다니던 미장원을 옮겼다. 그곳은 늘 사람이 붐비고 가격도 비쌌다. 새 미장원으로 옮기고 지난 일요일에 두 번째 찾았다. 일요일 오전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시간이다. 하지만 헤어 디자이너는 내가 앉자마자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들이 꼭 하는 말이 있다. "머리를 하고 어디를 가느냐", "누구를 만나느냐", "끝나고 뭘 하느냐"이다. 난 "홍대에 나가 친구를 만난다"라고 말했다. 대답이 이러면 다음 질문 역시 뻔하다. "홍대에 자주 가느냐"라고 묻길래, 난 "홍대에 자주 간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가서 뭐 하느냐"라고 되묻는다. 난 "합주하러 간다"라고 말한다. 그럼 자연스럽게 음악 얘기를 주고받는다. 이날 헤어 디자이너는 특이하게도 묻지도 않은 자기의 이야기를 더했다. "헤어 디자이너를 최근에 시작했어요. 그동안 많은 일을 했었죠. 어릴 때 홍대에서 일했어요, 바에서요. 짓궂은 손님들 때문에 고생 좀 했습니다. 어떤 손님은 술값을 내지 않고 도망가기도 하고요. 별의별 손님이 다 있었어요". 나는 "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헤어 디자이너는 바에서 일하는 애환에 대해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이야기 들어줄 상대로 손님만큼 편한 상대는 없다. 혹은 아무도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줄 상대가 없던가. 그녀는 나에게 자신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털어 낼 기세였다. 소설 한 권 분량의 이야기를 들을 뻔했지만 다행히 머리 손질이 끝나 1장에서 끝낼 수 있었다. 아마 다음에 내가 찾아오면 2장을 들려줄 것이다. 머리가 다 끝나고 나는 홍대에 친구를 만나러 갔다.
며칠 전 택시를 탔다. 말 많은 택시 기사일까봐 두렵다.택시기사들은 손님이 택시를 타는 이유가 바빠서거나 일을 보기 위해거나 쉬고싶어서라는 걸 모르나보다. 택시 기사들은 시사 프로그램을 즐겨 듣기 때문에 대부분 시사에 밝다. 이들과 시사에 관한 대화를 하다가는 택시 안은 정치 토론장이 되기 십상이다. 택시 기사의 경력에 관한 이야기도 듣기 힘들다. 이들은 대부분 한때 잘 나가는 대기업에 다녔든지, 아니면 개인 사업으로 꽤 성공하다가 실패했던지 둘 중 하나다. 자식 자랑을 늘어놓는 경우도 많다. 뭐가 됐든 나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고,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다. 다행히 어제의 택시 기사는 시사 얘기도, 자기 얘기도 꺼내지 않았다. 내가 oo 역 3번 출구로 가 달라고 부탁하자, 택시 기사는 "그럼 직진해서 우회전하면 안 되고, 우회전해서 좌회전 두 번 해야 합니다"라도 말했다. 내가 신기해하며 "어떻게 그렇게 지리를 잘 아세요"라고 묻자, 택시 기사는 "지하철에 번호 매겨지는 순서가 있습니다. 2호선은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1,2,3,4번으로 매겨지고, 6호선은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1,2,3,4번으로 번호가 매겨지거든요". 나는 "와 대단하십니다"라고 말했다. 택시 기사는 조금 우쭐하더니 지하철 출구 번호 매김 시스템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했다. 얘기가 장황해질 수 있었으나, 다행히 가까운 거리여서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시사와 자기 자랑 얘기 대신 지하철 출구 번호 매김 시스템에 대해 길고 긴 대화를 나눌 뻔했다.
일주일에 두 번씩 만나는 헬스 트레이너는 20대 중반의 여자이다. 그녀는 일부러 대화거리를 준비해서 나에게 말을 건다. 하지만 20대 여성과 50대 남성의 공통주제를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그래도 고객이 지루해하지 않기 위해선 적절한 대화가 이어져야 한다. 그녀는 나에게 "이번 주 휴일에는 무슨 일하셨나요"라고 물었고 난 "주말에 직장인 밴드를 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그녀는 늘 처음 듣는 양 "아 그렇군요"라고 대답한다. 난 어쩔 때는 "글쓰기 강의를 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그녀는 역시 "아 그렇군요"라고 대답한다. 그리곤 "책 좋아하세요?"라고 묻는다. 나는 "책 좋아합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그녀는 자기는 한 달에 한 권 책 읽는 것도 힘들다며 하소연을 한다. 그리고는 어색한 휴식이 이어지고 그 어색한 휴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시 운동을 한다. 하나!, 둘!, 셋!, 네!... 그리고 휴식. 다시 어색한 시간이다. "운동 마치고 집에 들어가면 뭘 하세요?"라고 그녀가 묻는다. 난 "책 읽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녀는 "아 네 그렇군요"라고 대답한다. 다시 어색함이 감돈다. "물 좀 드시고 오시겠어요"라고 그녀가 물으면 난 잽싸게 정수기로 이동해 물을 한 모금 먹고 온다. 그리고 다시 운동을 한다. 하나! 둘! 셋! 네!. 이렇게 몇 번을 반복하면 50분의 시간이 지나간다. 그리고 다음번 운동에도 똑같은 대화를 나눈다.
이들이 나에게 사소한 대화를 하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이들은 대화를 나눌 상대가 없다. 손님이 유일한 대화 상대다. 조금이라도 대화를 받아줄 거 같으면 연방 말을 쏟아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두 번째는 어색함을 깨기 위한 거다. 대화가 없는 그 순간의 어색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지경이다. 어색함을 깨기 위해선 무슨 말이라도 하는 게 좋다. 셋째는 서비스 정신때문이다. 손님은 돈을 지불하고 그들로부터 서비스를 받는다. 관계가 좋아서 나쁠 건 없다. 기왕이면 서비스가 좋은 데로 가려는 게 손님의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