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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단 Nathan 조형권 Jul 26. 2020

사람을 바르게 바라본다는 것

子曰 : 視其所以, 觀其所由, 察其所安, 人焉廋哉,  人焉廋哉

자왈, 시기소이, 관기소유, 찰기소안, 인언수재, 인언수재


 “하는 바의 일을 살피고 준수하는 바의 원칙을 관찰하며 그 마음을 이해한다면, 무엇을 불안해 할 것인가! 무엇을 불안해 할 것인가!” - 《논어》위정 중에서


 국가, 지역사회, 회사, 가정 등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과의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내 인생의 희로애락이 결정된다.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도 큰 복이다. 가족은 운명으로 만나는 것이지만 사회에서 만나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 어느 정도 내가 선택을 한 것이고, 나에게도 그 책임이 있다.


 나를 배려하고, 능력을 키워주는 사람을 만난다면 다행이지만 사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다. 80%의 좋은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20%의 그렇지 않은 사람들(성악설을 믿게 만드는)이 있게 마련이다. 그럴 때는 운명을 탓할 수밖에 없다. 지금은 그런 경우가 별로 없지만 예전에는 회사에서 고성(높은 소리)이 종종 오갔다. 아랫사람에게 반말과 욕설을 하고 강압적인 지시를 내렸다. 무엇보다 성과를 중요시하는 고도의 성장기에 있었기 때문에 이를 당연시했다. 기분이 상했을 때는 술을 마시면서 풀었다. 그것을 끈끈한 ‘정’이라고 여겼다.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기도 했지만 끝까지 미운 정으로 남는 사람들도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그 사람들은 나쁜 짓을 저질렀을까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의 마음에 평생 남을 상처를 주고, 공을 가로 채고,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을까? 비록 더 많은 재산과 권력을 누렸을지 모르지만 결국 시간 앞에서는 무력하다. ‘덕’을 쌓지 않고, ‘독’만 쌓은 사람은 언젠가 그 ‘독’이 돌아오게 마련이다. 나중에 회한의 눈물을 흘린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평생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사람도 있어서 안타까울 따름이다. 


 전에는 회사에서 마음의 상처를 받아도 당연시하는 문화였다. 그럴 때는 뜻이 맞는 동료들이나 선, 후배들과 술을 마시면서 위로하고 잊으려고 했다. 상처는 아물더라도 그 자국은 남게 마련이다. 사회생활을 해본 사람들은 누구나 이러한 상처자국을 갖고 있다. 그것이 영광의 상처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이제 시대는 변했다. 더 이상 고성장의 시대가 아니고 저성장에 접어들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상실의 시대》라는 소설책에 ‘상실’이라는 말이 그 어느 때보다 잘 어울리는 안타까운 시대다. 노력해도 예전만큼의 성과를 얻기가 쉽지 않다. 예전처럼 머리띠 매고 ‘으샤으샤’하는 문화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심지어 ‘으샤으샤’는 표준어가 아니고 일본에서 들어온 말이다. ‘영차영차’가 표준어다). 그 와중에 세상은 5G와 같이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어서 이제는 사람들의 창의력과 자질이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 시대에 맞는 리더십이 필요할 때다. 책상 뒤에 앉아서 손가락으로 지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직접 발로 뛰고 대화하고 교류하고 공감해야 한다. 


 중간 관리자급 리더는 억울한 점이 많다. 자신들이 부하 직원이었을 때는 조직에 몸과 마음을 희생하면서 충성을 다 바쳤는데 지금 새로운 세대(90년대 생)와는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다. 전에 일하던 방식이나 경험을 이야기하면 ‘꼰대’로 치부한다. 자신들은 선배들이 ‘꼰대 짓’을 해도 귀 기울여 들었지만 말이다. 중간에 끼어서 아랫사람들의 이야기도 듣고, 윗사람들의 이야기도 무시할 수 없다. 성과는 내야하고, 예전의 강압적인 방식이 잘 통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리더가 될수록 구성원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뛰어난 구성원 몇 명이 큰 성과를 내고, 조직이나 부서의 성패를 결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리더 자신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싹수가 좋은 사람을 찾아서 키워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전에 선배들이 한 것처럼 술 많이 사주고, 친하게 지내면 될까? 


 물론 같이 밥 먹고 인간관계를 돈독히 하는 방법은 지금도 중요한 방식이다. 서양식 사고방식이 아닌 ‘정’을 중요시 하는 동양식 방식도 버릴 수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에 대한 ‘관심’이다.  


 공자는 사람을 평가하는 측면에서 시視, 관觀, 찰察을 중요시했다. 모두 잘 지켜보고 살핀다는 의미다. 먼저 그 사람이 현재 무엇을 하는지(능력과 업적) 지켜봐야 한다. 이것은 관리자가 될 때 일반적으로 배우는 방법이다. 고과를 평가할 때도 가장 많이 적용하는 기준이다. 아무래도 겉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알아채기가 쉽다. 물론 이 기본조차 갖추지 않아서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를 때는 문제다. 구성원을 능력에 맞게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은 리더십의 가장 기본 중의 하나다. 


 둘째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사람이 준수하는 ‘원칙’을 봐야 한다. 원칙은 곧 가치관이다.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는 좀 더 깊게 그 사람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단순히 업무를 떠나서 삶의 원칙이 무엇인지 들어보는 것이다. 원칙이라는 것이 거창하게 보이지만 사실 원칙은 우리가 믿는 ‘옳고, 그름’에 대한 것이다. 사회 생활을 10년 정도만 해봐도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이 맡은 일에 충실하다. 남의 비판이나 칭찬에 신경 쓰기보다는 꾸준히 자신이 믿는 대로 나아간다. 그러한 ‘원칙’을 이해해야 한다. 


 마지막이 제일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부분이다. “마음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려면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있어야 한다. 평소에도 그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들어야 한다. 나의 공적이 중요해서 구성원들을 단지 나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물론 이렇게 해도 어느 정도 실적은 낼 수 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따라오는 사람들이 있고, 나처럼 야망을 품은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조직은 건전하지 못하다. 결국 정치가 판을 칠 것이다. 


 내가 아닌 남을 평가한다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나를 평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인 것처럼 상대방도 바라보면 된다. 능력도 중요하지만, 어떤 원칙이 있는지, 그리고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그것은 배려심이고 이해심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이러한 방법으로 살펴서 같이 일한다면 그 조직은 건전한 조직이 될 것이다. 결국 ‘살피고 바라본다는 것’(시視, 관觀, 찰察)은 ‘공감’의 다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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