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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단 Nathan 조형권 Aug 02. 2020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가장 큰 용기 중의 하나다.

지금도 질문이 두려우신가요?

 子曰: 由! 誨女, 知之乎!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자왈: 유 회여 지지호 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
 공자가 말했다. “유由야! 너에게 가르쳐 주겠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아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由’는 공자의 핵심 제자 중 한 명이었던 자로(기원전 542년 ~ 580년)의 이름으로 그의 본명은 중유(仲由)다. 그는 공자보다 9살 어렸고, 공자의 제자들 중에서 나이가 제일 많았다. 친구 사이로 보일 정도로 나이차가 크지 않았지만 그는 공자를 스승으로 깍듯이 모셨다. 

 자로는 본래 힘 좀 쓰는 용맹한 자였다. 그는 14년간 공자와 천하를 주유하면서 그의 보디가드 역할을 톡톡히 했다. 누군가 공자를 험담하면 그 사람의 입을 틀어막을 정도였다. 이렇게 든든한 제자였지만 그는 공자에게 많은 꾸지람을 들었다. 


 부유하면서 똑똑한 제자인 자공(기원전 520년 ~ 456년)은 칭찬과 질책을 비슷하게 받았지만 자로는 주로 혼나는 역할이었다. 아무래도 어릴 적부터 학문을 닦은 다른 제자들과는 학문의 깊이가 차이가 나기 때문이었다. 이런 그를 두고 공자는 다음과 같이 위로했다. 


 방안에 들일 정도는 아니라도 마루에 앉을 정도는 된다. 


 자로의 가장 큰 장점은 상대방으로부터 질책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누구보다 배운 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공자의 또 다른 성실한 제자 증자(기원전 505년 ~ 435년)와도 유사하다. 비록 그의 학문적 깊이는 증자만큼은 되지 않았지만 노력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그가 공자에게 혼이 난 것은 그만큼 그가 솔직한 성격이고, 자신이 궁금한 점을 감추지 않고 질문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체면에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모르고 실천하지 못하는 점을 부끄러워할 뿐이었다. 

출처: Pixabay

 그로부터 2,500년 후 우리나라에서 부끄러운 일이 하나 발생했다. 이미 기사에 많이 언급되었지만 미국의 오바마 전 대통령이 2010년 G20 회담을 위해서 한국을 방문하고 기자회견을 열었을 때다. 그는 마지막으로 한국 기자에게만 질문을 받는다고 했는데, 순간 회견장은 약 20초간 조용했다. 결국 중국기자가 질문을 가로채서 오바마 전 대통령에게 미국 정책의 문제점에 대해서 공격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 기자는 중국인들의 지지를 받았고, 한국인들은 그를 원망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기사를 빨리 써서 보내야 하고, 내가 질문을 던졌을 때 얻는 이득보다 실수를 했을 때 망신을 당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것이 결국 우리가 받은 교육 때문 아니겠는가? 


 우리에게는 어릴 적부터 트라우마가 있다. 학교 시스템은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 위주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그렇다 보니 선생님께 질문을 하면 망신을 당하거나 혼난 기억이 있을 것이다. 물론 지금의 교육 시스템은 그렇지 않다고 믿고 싶다. 또한 입시 위주의 교육을 받다 보니, 질문보다는 빨리 답을 찾는 능력이 더 중요했다. 그렇다면 대학교는 좀 더 나을까? 과연 대학교의 교수님들은 좀 더 마음을 열고 질문을 받아줄까? 당연히 그런 분들은 많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는 이미 10대 시절 ‘입’을 닫아버렸기 때문에 질문하는 것을 주저하게 된다. 질문했을 때 상대방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한 후는 또 어떤가? 직장에서는 마음껏 질문할 수 있을까? 조직 문화에 따라서 틀리겠지만 경직된 조직 문화에서는 불가능하다. 만약 상사에게 “왜 이것을 해야 합니까?”라고 질문하면 버르장머리 없는 신입사원으로 찍힌다. 우선 선배들이 뭐라고 할 것이다. 


 오랜 세월 질문을 안 하고, ‘아는 척’ 하다 보니 그런 삶에 익숙해졌다. 이제는 아이들이 질문을 해도 대답을 잘 안 하게 된다. “그냥 그런 거야.”, “알 필요 없어.”라고 퉁명스럽게 이야기한다. 물론 자상한 부모님들은 자신이 모르면 인터넷에서 찾아서 답을 알려준다. 하지만 아이가 좋은 질문을 했다고 매번 칭찬하는 부모님이나 선생님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사는 것이 각박하고, 실적 위주의 삶을 살다 보니 다들 마음의 여유가 없다. 앞서 언급한 기자 분들도 다른 언론사와 경쟁하기 위해서 시간에 쫓기다 보니 ‘질문’의 필요성을 못 느꼈다. 궁금할 시간조차 없는 것이다. 

출처: Pixabay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큰 용기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쉽지는 않다. 스스로 판단하기에 수준이 낮거나 엉뚱한 질문을 하면 면박을 당하기 일쑤다.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입을 닫게 된다. 그러나 입을 닫는 순간 나의 호기심도 사라지고 나의 지식도 얕아진다. ‘호기심’은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욕구다. 우리가 책을 읽고, 공부하고, 다양한 매체를 보는 것도 호기심 때문이다. 심리학이 발달한 것도 인간의 마음을 알고 싶은 호기심 때문이다. 왜 화를 내고, 우울하고, 기쁜지 그 비밀을 알고 싶은 것이다. 비행기가 날아다니고, 자동차가 굴러다니는 것도 호기심 덕분이다. 


 굳이 발명왕 에디슨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호기심, 그리고 질문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또한 “모른다는 것을 모른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그러한 질문을 받아주실 수 있는 마음도 필요하다. 이제는 그 어느 때보다 창의력이 중요한 때다. 질문하는 사람, 그리고 질문받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질문을 받았을 때 내가 모른다면 모른다고 이야기해야 한다.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서 아는 척하면 안 된다. 솔직히 모른다고 하고 확인해서 답을 알려줘야 한다. 그렇다고 나의 자존심이나 자존감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란 없다. 


 우리가 소위 말하는 뛰어난 사람들은 왕성한 호기심을 갖고 공부한다. 책을 손에 놓지 않는다. 그리고 질문을 한다. 다소 엉뚱하거나 우리가 보기에 말이 안 되는 질문도 서슴지 않고 한다. 그러면서 스스로 답을 찾고, 자기만의 이론을 정립한다. 질문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다. 


 공자께서도 말씀하셨듯이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이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지 않는 것은 정말 모른다”는 이야기다. 이제부터라도 얼굴에 철판을 깔고, 나만의 호기심을 불태우도록 하자. 모르는 것을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아는 척’ 하는 것이 진정 부끄러운 것이다.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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