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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단 Nathan 조형권 Sep 02. 2020

나와 도道가 다른 사람과 함께할 필요는 없다.

나의 도반, 부족을 찾아야 한다. 

 子曰 : 主忠信 無友不如己者 過則勿憚改 
 자왈 : 주충신 무우불여기자 과즉물탄개
공자가 말했다. “충신忠信을 중시하라. 자기와 길이 같지 않은 사람과 교류하지 말라. 잘못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려하지 말아야 한다.” 


 공자가 충실하고, 신의를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동안의 가르침과 흐름을 같이 한다. 나의 잘못이 있으면 고쳐야 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무불여기자(無友不如己者)를 직역하면 “나보다 못한 사람과는 친구가 되지 말라”인데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여기서 주의할 것은 나보다 못하다는 의미는 교육이나 생활수준이 떨어지는 사람이 아니라 ‘나와 다른 길을 가는 사람’이라고 봐야 한다는 점이다. 바로 앞 문장에 “충과 신을 중시하라”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즉 나는 사람들에게 성실하고 진실하고 충실할고 신의를 지키는데, 나보다 못한 사람은 이를 지키지 않는 사람을 의미한다. 


 공자는 상대방을 포용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세 명이 같이 간다면 나는 선한 사람뿐만 아니라 아닌 사람에게도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중에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으니, 그중에 선善한 것을 찾아서 따르고, 선善하지 못한 것을 보면 거울로 삼아 내 잘못을 고쳐야 한다.” -《논어》술이편


 하지만 배운다는 것과 길을 계속 같이 간다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예를 들어서 직장에서 좋은 상사와 고약한 상사를 만났다고 하자. 좋은 상사는 당연히 배울 것이 많을 것이고, 반면 안 좋은 상사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배운다. 그런데 과연 회사를 떠나서 이 상사와 계속 연락할 것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나의 인간관계에서는 당연히 사라지는 존재다.


 회사뿐만 아니라 친구, 동료, 선후배 관계도 모두 마찬가지다. 사회생활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엮이는 것은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문제가 있는 사람과 굳이 같이 있을 필요가 없다. 나에게 계속 부정적인 에너지만 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지 말라’는 교훈도 한, 두 번이면 족하다. 


 좀 냉정하게 들릴 수 있지만 가치관이 다른 사람과는 힘들게 같이 갈 필요가 없다. 나와 다른 물에서 노는 사람을 함께 섞으려고 한다면 부작용이 생긴다. 어떻게든 좋은 방향으로 설득해서 바른 길로 나아가기를 원하지만 웬만해서는 바뀌지 않는다. 서로가 피곤하고 에너지를 낭비하는 길이다. 


 예전에 회사에서 ‘독서의 힘’에 대해서 신입 사원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수업이 끝난 후 한 명의 신입 사원이 나에게 다가와서 질문했다. 

 “저는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데 친구들이 그렇지 않아서 고민입니다.”  
  바로 이렇게 답을 했다.  
 “그러면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독서 모임에 나가시면 됩니다.” 

 물론 친구들을 설득해서 책을 읽게 하는 것도 좋지만 그렇지 않은 친구들이라면 함께할 필요가 없다. 친구들과는 서로 다른 관심 주제를 논의하면 된다. 하지만 문제는 나이가 들면서부터다. 나는 책에 더 깊이 빠지고, 친구들은 스포츠나 정치, 연예인 등의 주제에만 관심이 있다면 점차 ‘갭’이 벌어지게 된다. 그럴 때는 친구들과 관계도 전과 같지 않음을 느낄 것이다. 


 반면 책을 읽으면서 나의 의식이 성장할수록 같이 성장하는 사람들과 ‘코드’가 더 잘 맞는다. 같은 책을 읽고 공감한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내가 생각한 부분과 맞거나 틀린 부분, 내가 밑줄 그은 부분을 상대방도 같이 밑줄을 그었다면 너무 반가운 기분이 든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관계를 ‘도반’이라고 부른다. 


 “도반(道伴) : 함께 수행하는 벗, 불법을 닦으면 사귄 벗” -《시공 불교사전》


 굳이 불교가 아니더라도 이렇게 ‘같이’ 추구하는 ‘가치’를 목표로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정말 큰 행운이다. 중요한 것은 역시 나 자신이다. 내가 나만의 가치를 위해서 노력하지 않는데 그런 친구들이 옆에 있을 리 없다. 현실을 부정하거나 불평하거나 미래에 걱정, 과거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옆에 있을 것이다. 나도 같이 불평을 하고 술을 마시고 세상을 원망한다면 어떻게 될까? 10년, 20년, 30년 후 나의 모습은 어떨까? 심지어 세상을 떠나기 전 어떤 생각이 들까? 


 ‘도반’의 관계는 그렇지 없다. 남녀노소 제약이 없다. 할아버지와 청년이 도반이 되기도 한다. 나이가 들었다고 무조건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나의 가치를 찾고 공부를 해야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어떨까? 내가 ‘충신忠信’의 가치를 믿고 주변의 친구에게 진솔하고 충실했는데 그 친구가 나의 믿음을 배반했다면? 당연히 큰 상처가 된다.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하고 설득해서 나와 같은 길道을 가자고 설득하면 좋겠지만 설득이 안 될 확률은 높다. 오히려 내가 더 상처를 받을 수 있다. 그럴 때는 서로 다른 길을 가야 한다. 그것이 ‘나’를 위한 길이기도 하다. 


 내 주변에 사기꾼보다는 ‘충신’을 중요시하는 사람들로 가득 채우면 된다. 단 한, 두 명이라도 그런 사람들을 알게 된다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는 말이 있듯이 좋은 영혼을 가진 사람들은 같이 모이게 된다. 누군가는 이런 말을 할 것이다. 

 “당신은 순진한 거야. 그렇게 순진해서 어떻게 이 험난한 세상을 살겠어?”


 맞는 말이다. 세상은 무시무시하게 험하다. 언제나 배신당하고 상처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믿는 가치를 버리고, 그들처럼 진흙탕에서 구를 필요는 없다. 학처럼 고고하게 산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차피 이승에서는 누구나 흙탕물을 피할 수 없다. 


 다만 내가 믿는 ‘가치’를 포기하는 순간 불행하게 살 것이 뻔하다. 다소 손해를 보더라도 나의 길道을 따라서 간다면 나와 같이 걸어가는 사람들, ‘도반’이 생겨난다. 이를 누군가는 부족(Tribe)이라고도 묘사한다. 20년, 30년 사귀었다고 나의 ‘도반’이라고 말할 수 없다. 단 한 달이라도 마치 몇 년을 안 것과 같은 사람도 있다. 


 이제 나의 인간관계를 돌아보자. 나와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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