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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단 Nathan 조형권 Sep 05. 2020

나를 극복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

욕심은 블랙홀과 같다

 

 顔淵問仁 子曰 : 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안연문인 자왈 : 극기복례위인, 일일극기복례 천하귀인언
 안연이 인仁을 묻자, 공자가 말했다. “자기를 절제하고 모든 것을 예禮의 원칙에 의거하는 것이 바로 인仁이다. 이렇게 한다면 천하의 모든 것이 모두 인仁에 귀의하게 된다.”


 공자의 수제자 안연이 ‘인仁’에 대해서 묻자 공자는 ‘극기복례’를 강조했다. 즉 나의 욕심을 버리고 예의범절을 따르는 의미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욕심은 무엇인가? 욕심은 ‘분수에 넘치는 것을 탐한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서 거짓으로 남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허영심, 내 것만 잘 챙기려는 이기심 등이 대표적이다. 사실 이러한 ‘욕심’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에서 나왔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는 것은 우리에게 잘 살고 싶은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욕구는 ‘건전한 바람’이고 욕심과는 다르다. 내가 의사, 변호사, 한의사, 연구원, 유튜버, 음악가, 작가, 선생님, 요리사 등 되고 싶다는 것은 나의 목표이면서 마음속 깊은 곳의 욕구다.


 욕구는 나의 ‘가치관’에서 발휘되어야 한다. 내가 누군가를 돕고 힘이 되고 싶어서 의사, 변호사, 한의사가 되었거나 우리나라의 과학 발전을 위해서 기여하고 사람들에게 좀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고 싶어서 연구원, 과학자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의 메시지를 통해서 사람들이 힘을 얻고,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 예술가가 되는 것도 이와 같다.


 욕심은 다르다. 돈을 벌고, 유명해지고 싶어서 일명 ‘사’ 자 돌림의 직업을 목표로 한다. 남들에게 큰소리치고 권력을 누리기 위해서 사업가, 정치인을 목표로 한다. 사람들에게 에너지와 희열을 주기보다는 돈을 벌고 명예를 누리기 위해서 예술가가 된다. 이렇게 욕심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은 ‘예’에 대한 개념도 별로 없다. 내가 이룬 것을 마음껏 누리고 과시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출처 : Pixabay


 “내 노력으로 이룬 부와 명예인데, 누가 뭐라고 그래?”


 이렇게 큰 소리를 치는 사람도 있다. 자기보다 못하다고 무릎을 꿇리는 사람들, 화가 난다고 면전에 물건을 던지는 사람들, 갑의 위치에서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하는 사람들 등 아주 다양하고 천태만상이다. 상대방에게 ‘예’를 갖추지 못하는 것은 결국 나의 ‘욕심’에 본인이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는 악마에게도 영혼을 팔 기세다.

 그런데 이러한 ‘욕심’이 무서운 이유는 ‘참된 나’를 잃어버리도록 하기 때문이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선한 마음’을 사라지게 한다. 그나마 죽기 전에 그것을 깨달으면 다행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죽음 앞에서도 그 욕심을 내려놓지 못한다. 자신이 남긴 욕심은 또다시 자손들에게 욕심을 물려준다.


 욕심과 욕망은 블랙홀과 같다. 끊임없이 빨아들이고 끝이 없다. 내가 죽을 때까지 하나라도 더 움켜쥐려고 한다. 죽으면 아무것도 없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곧잘 잊고는 한다.


 공자께서 ‘극기복례’라는 가장 핵심적인 ‘인’의 정신을 수제자 안연에게 이야기한 것은 그가 이것을 소화할 만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른 제자들 중에는 이러한 말을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를 하더라도 실행으로 옮기지 못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공자의 수제자 중에는 염유(기원전 522년 ~)라는 제자가 있다. 염유는 공자를 오랫동안 따라다니면서 많은 가르침을 배웠다. 염유는 뛰어난 행정가였고, 공자의 추천으로 노나라의 세도가인 계씨 가문에 등용되었다. 나중에 공자가 14년간의 유세를 끝내고 다시 노나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조치했던 사람도 그였다.

 그런데 그가 계씨 가문의 재산을 불리기 위해서 증세 정책을 쓰자 공자는 그에게 분노했다. 특히 누구보다 백성들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공자의 생각과는 정반대였다.《논어》에서 묘사된 공자는 인자하고, 자상한 모습이 대부분인데 이 대목은 깜짝 놀랄 정도로 공자의 노여움을 보여준다.  

 “염유는 나의 제자가 아니다. 너희들은 깃발을 들고 북을 울려 그를 공격해라” - 《논어》선진 편


 그것은 자신의 뜻을 거스른 제자에 대한 분노도 있었지만 이미 배가 부를 대로 불러서 주나라의 제후보다 더 부유한 계씨 가문의 주머니를 채워줬기 때문이다. 비록 염유가 자신의 주인을 위해서 충성을 다한 것이라고 해도 많은 백성들이 결국 세금을 더 내기 위해서 고생을 할 것이었다.

출처 : Pixabay

 공자의 수제자였던 염유도 그럴 정도이니 보통 사람들은 더할 수밖에 없다. 그만큼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다. 나의 부와 지위, 명예를 과시하고 싶은 욕구도 당연히 든다. 좋은 자동차, 집, 가구, 온갖 명품, 사회적 지위, 학벌 등 끝이 없다. 그러한 것을 자랑하다 보면 뿌듯하고 우월한 기분이 든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욕심은 블랙홀과 같다. 자랑을 하거나 갑질을 하거나 그것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계속하고 싶은 욕구에 빠져든다.


 더 큰 문제는 ‘불안감’이다. 내가 쌓은 욕망의 탑이 무너질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마치 진시황제가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 불로초를 찾았던 것과 마찬가지다. 결국 그는 제명에 살지 못하고 죽었다. 돈은 내가 무덤에 가져갈 수 없고, 명예나 지위는 내가 나이가 들면 사라진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차 잊혀지게 되는 것이다. 잘 나가던 시절 아무리 각광을 받던 사람도 언제나 그 끝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극기복례’가 중요하다. 단 하루(一日)라도 나의 욕심을 이겨내고 예를 갖춰야 한다. 늘 겸손하고 내가 갖고 있는 것은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나를 사랑하는 인(仁)의 정신이 필요하지만 또한 남을 사랑하고 자비를 베푸는 인(仁)의 정신도 필요하다. 공자가 바란 세상은 결국 많은 사람들이 ‘극기’와 ‘복례’를 하면서 상대방을 배려하고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이었다. 과연 지금 이 세상은 어떤지 돌아보게 된다. 나는 지금 ‘극기’, ‘복례’를 하고 있는가? 내 주변의 사람, 유명인 들은 어떠한가? 왠지 모르게 자신을 부끄럽게 만드는 송곳 같은 말이다.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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