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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단 Nathan 조형권 Sep 27. 2020

소인(小人)과는 어떻게 싸워야 할까?

나의 뜻을 갖고 나아가는 것이 이기는 길이다.

 子曰 : 君子上達 小人下達

 자왈 : 군자상달 소인하달

 공자가 말했다. “군자는 위로 대의에 통달하고, 소인은 아래로 온갖 나쁜 일에 통달한다.” 


 예로부터 수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모함을 받고 억울하게 처벌을 받거나 명성에 금이 갔다. 지금은 예전보다 공정한 사회를 지향하고 있지만 여전히 억울한 사람들이 많다. 약자의 등골을 빼먹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앞으로 인류가 지구 상에 있는 한 이러한 ‘소인’(小人)들은 계속 존재할 것이다. 누군가를 괴롭히거나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남을 험담하는 것을 당연시 여기면서 말이다. 


 뉴스에서 뿐만 아니라 주변에서도 모함을 받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예를 들어서 선의로 글을 쓴 경우에도 상대방은 댓글로 너무나 쉽게 그 사람을 비난한다. 도무지 좋은 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글을 쓰면 비난이고, 말을 하면 험담이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거나 건전한 비판은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필요하다. 하지만 문제는 없는 사실을 지어내거나 과장할 때다. 전후관계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오해하기 십상이다. 


 정말로 궁금해진다. 도대체 악플을 다는 사람이나 남이 하는 행동에 꼬투리를 잡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그러면서 자신의 스트레스를 푸는 것인가? 남이 괴로워하거나 힘든 모습을 보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인가? 결국 자신이 하는 말과 행동이 업보로 쌓여서 언젠가 안 좋은 에너지로 돌아온다는 것을 모르는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악플로 상처 받고 세상을 떠났다. 이제 포털 사이트 중 스포츠나 연예 기사에는 댓글을 달 수 없다. 하지만 정치나 사회 기사를 읽어보면 여전히 낯 뜨거운 댓글들이 난무하다. 마치 기사에 나온 사람들이 자신의 친구, 아니 친구보다 못한 존재인 것처럼 욕을 하고 비난한다. 내 가족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남이 하는 일에 대해서 무조건 비난부터 하는 사람들에게 ‘그 일을 맡겨보면 어떨까’라는 생각도 든다. 물론 이러한 댓글들을 되도록 접하지 않으려고 한다. 보면 볼수록 가관이기 때문이다.

 


 “너 자신을 알라”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이렇게 이야기한 것도 결국 남을 비판하고 비난하기 전에 먼저 나 자신을 돌아보라는 이야기였다. 나는 과연 비난받을 사람보다 잘하고 있는가? 충분히 도덕적이고 정의롭게 살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비난할 자격이 있다. 물론 그렇더라도 품위 있게 비평을 해야 한다. 


 얼마 전에 유명 출판사 대표님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그분은 출판업을 시작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미 여러 분야에서 베스트셀러도 냈고, 확실한 자신만의 철학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수많은 질투와 모함을 받으면서 있지도 않은 사실로 마음고생을 했다. 결국 우울증으로 몇 년간 고생을 했다고 한다. 다만 책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출판업을 포기하지 않고 지금은 수백 억 원의 매출을 올리는 대형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다. 그것은 이 분이 ‘대의’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그분의 대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책을 통해서 감동과 지식, 경험을 선사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소인배들이 그를 깎아내리려고 해도 버틸 수 있었다. 


 또 다른 경우도 있다. 잊을 만하면 누군가를 비난하는 메일이 나에게 온다. 그 사람은 주로 “폭로합니다. 선의의 피해자가 나오지 않기 위해서 진실을 알리려고 합니다.” 등의 메일을 보내서 마치 자신이 정의의 기사라도 되는 척한다. 그런데 이 메일에는 이상한 점이 많다. 첫째, 이 사람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는다. 주로 추적이 되는 않는 메일 계정을 운영한다. 둘째, 내용에서 선의가 느껴지지 않는다. 별것 아닌 내용을 부풀려서 마치 엄청난 피해인 것처럼 과장한다. 셋째, 법을 잘 이용한다. 진정 억울한 사람들이 이용할 것을 자신의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해서 사용한다. 


 이런 소인들이 무섭고 두렵다. 왜냐하면 정말로 그 수법이 교묘하기 때문이다. 공자께서 정말 제대로 짚었다. “소인은 온갖 나쁜 일에 통달한다.” 마치 뇌의 구조가 그렇게 생긴 것처럼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데 최적화되어 있다. 사실 법은 이런 사람들을 벌주는데 쓰여야 하지만 이들은 법을 잘 이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법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사용한다. ‘도의’나 ‘상도’라는 것도 없다. 


 내가 아는 또 다른 분은 정말로 억울한 피해를 당해서 청와대 게시판인 국민청원에 글을 올렸다. 그분은 갑질을 하는 고용주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고 그만뒀다. 그 고용주는 비도덕적인 행동으로 고객들(아주 어린 선량한 고객들)에게 피해를 주고, 막대한 이득을 챙겼다. 결국 이러한 행태를 보다 못해 항의를 하고 그만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동의를 받지 못해서 이 사건은 조용히 묻혔다. 그 고용주, ‘소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부디 다시는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를 안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세상은 부당한 것일까? 왜 선의의 피해자는 계속 나오고, 소인들은 면죄부를 받는 것일까? 


 사실 세상의 모든 잘못을 잡기에 우리의 법은 완전하지 못하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의 대화나 사회의 인식이 변화하면서 스스로 자정하고 해결해야 할 부분이다.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나의 뜻을 갖고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 몇 년, 몇십 년이 걸리더라도 꾸준히 나를 믿고 나아가야 한다. 다행히 세상에는 나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소인은 소인일 뿐이다. 설득해서 바뀌면 다행이겠지만 이미 뇌세포가 그렇게 최적화된 사람들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들이 음지에서 계속 ‘대의’를 가진 사람들을 음해하거나 비난하더라도 나아갈 수밖에 없다. 멈추는 순간 지는 것이다. 억울하더라도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정말로 억울한 것은 강하게 반론을 제기해야 하지만 매번 그럴 수는 없다. 그만큼 힘과 에너지를 너무 많이 낭비하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완벽하게 정의로운 사회란 존재하지 않는다. 역시 나 자신이 떳떳하게 사는 수밖에 없다. 꿋꿋이 살아가는 것이 이기는 것이고, 곧 정의다. 무릎을 꿇는 순간 포기하는 것이고, 패배다. 정말 힘들 때는 나를 지켜보고, 응원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점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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