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이>편 1.8
子曰; “主忠信, 無友不如己者. 過則勿憚改.”
자왈 주충신 무우불여기자 과즉물탄개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정성을 다하고 믿음을 지켜라. 자기보다 (덕행이) 못한 사람과 교류하지 말라. 과오가 있으면 고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 학이學而 1.8
코로나19는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습니다.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이 커진 반면, ‘위드코로나’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팬데믹 상황에 익숙해졌습니다. 어디를 가든 마스크를 휴대하고 손을 깨끗하게 씻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이렇게 겉으로 드러나는 것 외에 가장 큰 변화는 인간관계일 것입니다. 혼자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그동안 약한 관계의 끈은 자연스럽게 정리가 되고 ‘관계’에 대해서 보다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혼자 있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원하든 원하지 않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 보니 나와 잘 맞지 않는 사람과도 억지로 관계를 이어갔고 이는 또 하나의 스트레스로 다가왔습니다. 수천 년의 지혜를 담은《논어》에도 관계에 대한 내용이 많습니다. 공자는 좋은 관계를 갖기 위해서 우선 본인이 인仁의 마음을 갖고 예禮를 실천하면서 군자가 되라고 주문합니다.〈학이편〉에서도 정성을 다하고 믿음을 지키고 내가 잘못이 있으면 고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상대방이 군자가 아니고, 그렇지 않게 행동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이때 공자가 말씀하신 무불여기자(無友不如己者)의 의미를 한 번 보시죠. 이를 직역하면 “나보다 못한 사람과는 교류하지 말라”인데요. 이와 비슷한 내용이 자한(子罕)편(9.24)에도 나옵니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생각해볼 만한 문장입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나보다 못하다는 의미는 교육이나 생활수준이 떨어지는 사람이 아니라 ‘덕행이 떨어지는 사람’이라고 봐야 한다는 점입니다. 바로 앞 문장에 “충과 신을 중시하라”는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들에게 성실하고 진실하고 충실하고 신의를 지키는데, 나보다 못한 사람은 이를 지키지 않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기본적으로 공자는 상대방을 포용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세 명이 같이 간다면 선한 사람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도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세 사림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그중에서 선善한 것을 선택해서 따르고, 선善하지 않은 것은 참고해서 고친다” - 술이述而 7.21
하지만 배운다는 것과 길을 계속 같이 간다는 것은 엄연히 다릅니다. 예를 들어서 직장에서 좋은 상사와 고약한 상사를 만났다고 하죠. 좋은 상사에게는 당연히 배울 것이 많고, 반면 안 좋은 상사에게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배웁니다. 그런데 과연 회사를 떠나서 이 상사와 계속 연락할 것인가요?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나의 인간관계에서 ‘삭제’되는 존재입니다.
회사뿐만 아니라 친구, 동료, 선후배 관계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생활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엮이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문제가 있는 사람과 굳이 같이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나에게 계속 부정적인 에너지만 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지 말라’는 교훈도 한, 두 번이면 족합니다.
좀 냉정하게 들릴 수 있지만 가치관이 다른 사람과는 힘들게 같이 갈 필요는 없습니다. 나와 다른 물에서 노는 사람을 함께 섞으려고 한다면 부작용이 생깁니다. 물과 기름이 섞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든 좋은 방향으로 설득해서 바른 길로 나아가기를 원하지만 웬만해서는 바뀌지 않습니다. 서로가 피곤하고 에너지를 낭비하는 길입니다.
만약 나는 책을 좋아하고 친구들과 독서모임을 하고 싶은데 친구들은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할까요? 친구들을 설득해서 책을 읽게 하는 것도 좋지만 설득이 안 된다면 함께할 필요가 없습니다. 친구들과는 서로 다른 관심 주제를 논의하면 됩니다.
문제는 나이가 들면 서입니다. 나는 책에 더 깊이 빠지고, 친구들은 스포츠나 정치, 연예인, 주식 등의 주제에만 관심이 있다면 점차 ‘갭(Gap)’이 벌어집니다. 그럴 때는 친구들과 관계도 전과 같지 않음을 느낄 것입니다.
반면 책을 읽으면서 나의 의식이 성장할수록 같이 성장하는 사람들과는 ‘코드’가 더 잘 맞습니다. 같은 책을 읽고 공감한다면 더욱 그럴 것입니다. 내가 생각한 부분과 맞거나 틀린 부분, 내가 밑줄 그은 부분을 상대방도 같이 밑줄을 긋는 다면 너무 반가운 기분이 들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관계를 ‘도반’이라고 부릅니다.
“도반(道伴) : 함께 수행하는 벗, 불법을 닦으면 사귄 벗” -《시공 불교사전》
굳이 불교가 아니더라도 이렇게 ‘같이’ 추구하는 ‘가치’를 목표로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정말 큰 행운입니다. 중요한 것은 역시 나 자신입니다. 내가 나만의 가치를 위해서 노력하지 않는데 그런 친구들이 옆에 있을 리 없습니다. 현실을 부정하거나 불평하거나 미래에 대한 걱정, 과거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옆에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먼저 자신의 잘못을 고치고, 정성을 다하고 믿음을 지키라고 한 것입니다. 나의 마음에 향기가 난다면 그 향기를 맡고 다른 이들이 모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반’의 관계에는 남녀노소 제약이 없습니다. 할아버지와 청년이 도반이 되기도 합니다. 나이가 들었다고 무조건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나의 가치를 찾고 공부를 해야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이런 경우는 어떨까요? 내가 ‘충신(忠信)’의 가치를 믿고 주변의 친구에게 정성을 다하고 믿음을 줬는데 그 친구가 나의 믿음을 배반했다면요? 당연히 큰 상처가 됩니다.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하고 설득해서 나와 같은 길道을 가자고 설득하면 좋겠지만 설득이 안 될 확률이 높습니다. 오히려 내가 더 상처를 받을 수 있다. 그럴 때는 서로 다른 길을 가야 합니다.
결국 내 주변에 ‘충신’을 중요시하는 사람들로 가득 채우면 됩니다. 단 한, 두 명이라도 그런 사람들을 알게 된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좋은 영혼을 가진 사람들은 같이 모이게 됩니다. 누군가는 이런 말을 할 것입니다.
“당신은 순진한 거야. 그렇게 순진해서 어떻게 이 험난한 세상을 살겠어?”
맞는 말입니다. 세상은 무시무시하고 험난합니다. 언제나 배신당하고 상처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믿는 가치를 버리고, 그들처럼 진흙탕에서 함께 구를 필요는 없습니다. 학처럼 고고하게 산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어차피 이승에서는 누구나 흙탕물을 피할 수 없습니다. 다만 진흙탕을 진흙탕으로 인지하는 것과 그것을 당연시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즉 ‘충신’을 손해라고 생각하고, 거짓을 당연시 여기는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도반을 누군가는 부족(Tribe)이라고 묘사합니다. 20년, 30년 사귀었다고 나의 ‘도반’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단 한 달이라도 마치 몇 년을 안 것과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제 나의 인간관계를 돌아보시죠. 나와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 있는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