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는 가난하면서도 도道를 즐기고, 부유하면서도 예禮를 좋아한다
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자공왈 빈이무첨 부이무교 하여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자왈 가야, 미약빈이락, 부이호례자야
자공이 말했다. “가난한데도 아첨이 없고, 부유한데도 교만이 없으면 어떻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괜찮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가난하지만 즐기고, 부유하면서도 예禮를 좋아하는 자에 미치지 못한다.” - 학이學而 1.15
자공(子貢, 기원전 520년 ~ 456년)은 공자의 제자 중에서 가장 성공한 인물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공은 부와 명예, 권력의 기준에서입니다. 그는 본래 위나라 출신이고, 본명은 단목 사(端木賜)입니다. 누구보다 말솜씨가 뛰어났습니다. 공자도 그의 제자 중에서 자공과 재아(宰我, 기원전 522년 ~ 458년)를 언어 방면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인정할 정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뛰어난 정치와 행정 능력 덕분에 노나라와 위나라의 재상을 모두 지냈습니다. 공자가 14년간 천하주유를 할 때도 경제적 도움을 줬습니다. 똑똑하고, 능력 있고, 학문적 성취도 보였기 때문에 공자가 총애하는 제자 중 하나였습니다. 총명함으로는 공자학당 서열 2위였습니다(1위는 당연히 안연이었습니다).《논어》에서도 자로(이름: 중 유)와 더불어 자주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어느 날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스승님, 가난하면서도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지만 교만하지 않는 삶은 어떤가요?”
사실 이 정도 사람만 될 수 있어도 상당한 ‘도道’의 경지에 이른 것입니다. 그런데 공자는 여기서 한술 더 떠서 이야기했습니다.
“괜찮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가난하면서도 이를 즐기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자에는 미치지 못하다”
즉 물질적으로 풍족하지 않더라도 나만의 즐거움을 찾고, 부자가 되더라도 ‘예’를 잊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이들의 대화가 끝난 것은 아닙니다.
“스승님, 이러한 경지가 바로《시경》에서 나오는 ‘절차탁마(切磋琢磨)’(옥돌을 자르고 줄로 쓸고 끌로 쪼고 갈아 빛을 낸다는 뜻으로 학문이나 인격을 갈고 닦음)가 아닌지요?”
이때 공자가 감탄하면서 말합니다.
“사(자공의 자)야, 비로소 너와 더불어《시경》을 논할 수 있겠구나.”
공자는 평소《시경》에 나오는 시詩를 좋아하고 종종 인용하고는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공이 이 책에 나오는 ‘절차탁마’의 문구를 언급한 것을 기특하게 생각한 것이죠. 자공이 공자에게 극찬을 받은 몇 안 되는 일화 중 하나입니다. 그만큼 가난하지만 즐거워하고, 부자이면서도 ‘예’를 좋아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꾸준히 갈고닦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안빈낙도의 삶을 실천한 제자, 안연
공자의 제자 중에서 이를 잘 실천한 이는 누구일까요? 우선 안연을 언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고,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늘 유유자적하게 살면서 배움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공자가 이렇게 감탄하며 말할 정도였습니다.
“현명하구나, 안회(안연)여! 밥 한 그릇과 표주박 한 개에 담긴 마실 것으로 궁벽한 마을에서 사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그 근심을 감당하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바꾸려 하지 않으니, 현자로구나, 안회여!” - 옹야(6.9)
스승이 감탄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공자는 음식에서도 도道를 중요시했습니다. 회는 가늘게 썰어야 하고, 고기도 바르게 잘라야 했습니다. 그 외에 상태가 좋지 않은 음식은 아예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물론 건강을 위해서 그랬겠지만, 안연의 밥 먹는 상태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공자는 안연을 존경하는 마음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자로서 ‘예’를 갖춘 사람은 누구일까요? 자신과 경제적, 사회적 지위가 다르더라도 이를 개의치 않고 겸손하게 상대방을 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 부자라는 것을 하나의 권리라고 생각하고 ‘갑질’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땅콩 회항’, ‘물컵 사태’ 이후 이러한 행태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잊을 만하면 나타납니다. 고대 사회는 더욱 심했을 것입니다. 역대 수많은 왕과 귀족 등이 그러했고요. 근대에는 제국주의로 인해서 우리가 소위 선진국이라고 부르는 부자 국가들이 앞 다퉈서 약소국을 유린하고 약탈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공자나 이후 맹자가 지향한 인간상, 국가상은 아닙니다.
스토아학파의 철학을 실천한 아울렐리우스 황제
부자의 ‘예’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이 분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바로 로마 제국의 전성기를 연 오현제의 마지막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121년 ~ 180년)입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철학을 공부했고, 스스로 절제하고 노력하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들이 없던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해서 황실의 후계자로 선택되었습니다. 바로 그가 17살이 될 때였습니다. 평범한 출신의 소년이었던 그는 황제의 양자가 되었고, 이후 열아홉 살에 집정관이 되었고, 마흔 살이 될 때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뜻하지 않은 기회를 얻어서 부와 권력을 움켜쥐었지만 좋은 군주가 되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이런 글을 썼다고 합니다. “황제 행세를 하려 들지 말고 황제 노릇에 물들지 않도록 조심하라. (중략) 늘 소박하고, 선하며, 순수하고, 진지하며, 단호하고, 정의를 수호하라.” 그의 인생관은 물질을 중요시하지 않고, 고통과 욕망을 극복하고자 하는 스토아 철학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부와 권력을 가진 절대 군주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소박한 마음과 높은 정신의 경지를 추구한 황제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부지기수죠. 로마의 폭군이었던 네로는 열여섯 살에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음악가나 배우가 되고 싶었을 정도로 예술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만약 황제가 되지 않았다면 예술가의 길을 갔을지 모릅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되었고, 훌륭한 스토아학파의 철학자 세네카를 스승으로 뒀습니다. 하지만 배움을 게을리하고 나중에는 친모를 살해하고 살인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피로 물든 왕좌는 곧 다른 이에게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가난하지만 ‘안빈낙도’의 경지를 즐겼던 안연, 부자였지만 ‘예’를 중요시하고 겸손하고자 했던 자공. 서로 다른 인생을 살았지만 각자의 삶에서 ‘도’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사실 공자에게 있어서 ‘부富’는 뜬구름 같지만 정당하게 돈을 모으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가치관입니다. 내가 어떤 상태에 있든 내가 믿는 가치를 추구해야 되겠죠. 부자이든 가난하든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바로 가난하지만 ‘도’를 즐기고, 부자이면서 ‘예’를 잊지 않는 군자의 경지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