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사람들은 가장 존경하는 부장으로 ‘오사카 사는 사람들’의 마츠다 부장을 종종 언급한다. 그는 일본에서 부동산 업계에 종사하고 있는데, ‘오사사’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면서, 평소 방문하는 맛집을 소개하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정장을 입고 다니고, 명품 시계를 차고 다니면서, 다양한 음식점에서 술과 음식을 즐기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수많은 직장인들은 그의 삶을 동경하게 되었다. 여성보다는 오히려 남성팬이 많을 정도로 마츠다 부장의 인생은 많은 직장인들의 ‘워너비’ 모습이다.
그가 말을 잘 하고, 멋있는 모습에 사람들은 팬이 되었지만, 사실 내가 주목한 부분은 ‘안빈낙도’의 삶이다. 처음 그가 소개한 맛집들의 대부분은 회사 근처에 식당이었고, ‘야키니꾸’ 고깃집도 평소에 가던 식당이다. 가격도 그다지 비싸지 않고, 저렴한 편에 속한다. 그런데 마츠다 부장은 이러한 식당에서, 자신만의 루트, 술을 마실 때도 생맥주, 하이볼, 사케, 일본소주 등으로 순서를 지키면서, 진정으로 음식을 즐기는 모습을 보여준다. 복요리 자격증도 있고, 복집을 운영했을 정도로 음식에 대한 지식도 전문가 수준이다. 사람들이 그를 동경하고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자신의 인생을 진정으로 즐기는 모습 때문이리라.
외제차에 화려한 집, 호텔에서, 화려한 음식을 뽐내는 것이 아니라 소박한 삶에서 직장 동료들과 회식하는 모습에서 많은 이들이 공감을 한 것이다. 물론 그의 유튜브 채널도 유명세를 탔고, 대형 회사의 스폰서를 받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많은 돈을 벌 것이다(이미 많이 벌었을 것이다). 그의 인생을 즐기는 모습이 얼마나 더 오래지속 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50대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이드를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그의 나이도 72년 생으로 50대 초반이니 더욱 그렇다.
젊은 시절에는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장소를 다니면서 경험을 쌓는다면, 나이가 들면서 어느 정도 호불호가 생긴다. 내가 좋아하는 장소, 음식 등이 대략 정해진다. 그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전 세계를 주유하면서 온갖 술과 음식을 다 맛보았지만 결국 나이가 들면서, 소박한 음식에 점차 안착함을 느낀다. 밥과 김과 김치만 있어도 훌륭한 식사 한 끼가 된다. 물론 가끔은 비싼 식당에서 값비싼 음식과 술을 마시고 싶을 때도 있지만, 이제는 그 감동이 예전만큼 강하지 않다. 대학에 입학하고, 막걸리만 마시다가 소주에 감동하고, 소주를 질리게 마시다가 맥주를 마시면서 감동하고, 이후에 양주, 와인을 마시면서 신세계를 만나는 것과 마찬가지다. 요새는 마츠다 부장처럼 나름의 패턴을 갖고, 단골 식당이나 루트를 갖고 음식을 먹거나 술을 마신다.
보통 40, 50대에 이르면 술이 약해지기 때문에 예전만큼 “부어라, 마셔라”를 하기 힘들다. 술을 줄이게 되고, 좀 더 약한 술을 찾거나 음미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러면서 많은 이들이 와인의 매력에 빠진다. 요새는 와인이 더 이상 고급술이 아니기 때문에, 편의점, 마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와인에 대한 설명도 잘 되어 있어서, 내가 원하는 와인의 타입을 정할 수 있다. 예전에 만 원에 4캔으로 행복한 시절이 있었다면, 이제는 만 원에 와인 한 병을 마실 수 있으니, 더 좋은 환경이 된 셈이다.
이미 여러 차례 언급한 공자의 삶도 그러했고, 예전에 수많은 학자들도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 굳이 정치계에 진출해서, 정쟁의 소용돌이에 빠져 살기 보다는, 시골에서 유유자적하게 친구들과 어울려서 시문을 짓는 것이 하나의 낙이었으리라. 물론 그러한 상류층 선비에 대한 삶을 그리워하고 지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당시 대부분을 이루는 백성들은 가난의 고통에 허우대고 있었지만 그래도 힘든 일상의 삶에서도 같이 품앗이를 하면서 정을 나누고, 가끔은 같이 음식을 나눠 먹는 풍습도 인생을 여유 있게 즐기는 방식이었다.
반면, 마음에 여유를 갖지 못하고, 쫓기면서 사는 사람들도 많다. 특히 마흔 이후의 삶을 살면서 지나치게 현실과 타협하고, 부와 명예를 좇는 경우다. 물론 남들에게 인정을 받고 거기에 대한 보상은 필요하다. 그것은 중요한 동기 부여다. 동기 없이 무언가를 꾸준히 하기란 어렵다. 우리가 사업을 하거나, 회사에서 일하는 것은 결국 거기에 대한 대가를 얻기 위함이다. 그것은 금전적인 것이 될 수도 있고, 명예가 될 수도 있다.
다만, 그러한 인생의 게임에서 룰렛처럼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비록 보상을 얻을 수 있겠지만, 늘 피곤하고 힘든 인생을 사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아무리 좋은 집에, 비싼 차를 몰고 다녀도 내 마음이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면. 맛있는 음식과 술을 마셔도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러한 인생을 산다는 것은 그야말로 고역이다. 특히 오십에 이르면 회의감이 더 커진다. 적어도 서른, 마흔에는 무언가 목표를 향해서 마구 달리게 된다. 그러면서 뭔가 가시적인 성과도 보인다. 하지만 오십에 이르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과연 내가 추구했던 목표가 맞았던 것인지, 아니면 나는 그냥 다른 누군가의 인생을 위해서 살았던 것이 아닌지 라는 생각도 들 것이다.
사회적인 문제가 되는 ‘기러기 아빠’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그 삶을 부러워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 자신이 돈버는 기계로 전락해서, 일을 해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나는 뼈 빠지게 일하고 있는데, 다른 가족들은 여유 있게 인생을 즐기면서 산다고 생각될 수 있다. 나의 자리는 점차 사라지고, 존재감은 옅어지게 된다. 나중에 온 가족이 다시 모여서 행복하게 살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허다하다. 결국 외롭게 일하면서 살다가 나중에 가족이 함께 되어도 다시 외로운 마음이 들 것이다.
앞서 마츠다 부장을 언급한 이유도 이와 같다. 아무리 일이 중요하고, 사회적 성공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유유자적한 삶을 즐길 줄도 알아야 한다. 취미를 가지라는 이야기도 많지만, 그보다는 우선 내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채워줄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것은 다양한 방식이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 책을 읽고, 자신을 성찰하는 방식도 좋을 것이다.
‘시’를 읽어보는 것도 좋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늘 시를 모아둔 《시경》을 배우라고 권했다. 시가 사람들 사이에 공통된 화제를 이끌어 내고, 관찰할 수 있고, 사람들을 모으고,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비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자연을 논하게 되니, 정서적으로도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양화 17.9〉).
“너희는 어찌하여 시를 배우지 않느냐? 시는 흥미를 이끌 수 있고, 관찰할 수 있고, 사람들을 모을 수 있고,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 원망할 수도 있다. (중략) 새와 짐승과 풀과 나무의 이름을 많이 기억할 수도 있다.”
요새 우리들이 가요를 듣고 노래를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를 읽는 것도 낭만이다. 한 번쯤 기회를 내서 시를 읽고 낭독해보는 것도 좋다. 어떤 시는 마음에 안식을 줄 수 있고, 또 어떤 시는 사회적인 부조리를 논하기 때문에 공감할 수 있다. 이 또한 나에게 일어나는 ‘작은’ 변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