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에서 사용되는 아이폰이 약 10억대 정도라고 한다. 아이폰이 잡스의 유산인 것은 맞지만 그 유산을 복리 이자로 더 키운 것이 팀 쿡이다. 애플의 CEO 팀 쿡에 대한 자서전이 나왔을 때 누구보다 이 책을 기다렸다. 월턴 아이작스가 쓴《스티브 잡스》자서전도 집에 국문판과 영문판 모두 있다. 그만큼 애플이라는 회사의 출생, 성장, 쇠퇴, 재성장, 황금기는 하나의 드라마 그 자체다.
사실 애플 = 스티브 잡스라고 할 정도로 잡스의 흔적은 너무나 컸다. 사람들은 병상에 있는 잡스가 언제든지 다시 복귀해서 신제품 발표회 때 카리스마 넘치는 발표를 기대했다. 심지어 팀 쿡도 임시 CEO직을 맡았을 때 자신이 계속 그 일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조차도 잡스가 없는 애플은 상상하기조차 힘들었다.
2011년 10월 5일. 잡스는 마침내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두어 달 전 일요일에 쿡은 잡스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잡스가 지금 집으로 올 수 있는지 물어봤다. 쿡은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그의 집에 갔다. 잡스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모든 걸 결정하게 될 거야”
쿡은 잡스가 이렇게 자신의 통제권을 쉽게 넘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가 다시 복귀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결국 잡스는 세상을 떠났다.
잡스는 두 번의 병가를 냈을 때 쿡에게 경영을 맡겼을 정도로 이미 쿡을 믿고 신임했다. 잡스는 2003년 췌장암 진단을 받았고, 2009년, 2011년 두 차례 자리를 비웠다. 그때 전 세계 공급망 관리를 하면서 COO의 자리에 있던 쿡을 자신의 대행으로 맡기고, 병상에서 진두지휘했다. 그러면서 잡스는 쿡을 지켜봤을 것이다. 역시 잡스의 기대대로 쿡은 성실히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 그것은 CEO가 되겠다는 야심이 아니었다. 쿡은 일 자체를 ‘신성한 노동’이라고 여겼다. 그것이 그가 어릴 적부터 믿은 신념이다. 하지만 그런 쿡 조차도 CEO, 그것도 애플 CEO는 너무나 부담스러운 자리였다.
“쿡의 CEO 인생이 축복이자 저주가 될 것임이 시작 단계에서부터 분명해졌다. 애플의 CEO 역할은 대부분의 사람이 감히 꿈도 꾸지 못하는 인생 최고의 지위였지만,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위험도가 높은 자리이기도 했다.”
쿡이 CEO 자리에 앉았을 때, 우려 섞인 목소리와 비난하는 글들도 많았다. 무엇보다 혁신의 아이콘인 애플이 더 이상 창의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컸다. 그도 그럴 것이 애플의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는 모두 잡스의 유산이었다.
하지만 쿡은 잡스처럼 되려고 하지 않았다. 자신이 갖고 있는 최대의 장점을 극대화하려고 했다.
“그는 스스로 스티브가 되려고 애쓰지 않았어요. 참으로 영리한 친구지요. 누구도 스티브가 될 수는 없는 거니까요. 대신에 그는 자신의 모습 그대로 자신이 회사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에 주력했습니다.”
그렇다면 쿡의 배경은 어떤가?
그는 남부 앨라배마주 시골의 아주 평범한 소년이었다. 아버지는 해군 기지에서 일하면서 선박 건조와 수리를 담당했다. 그가 자란 동네인 로버츠 데일은 전형적인 남부 소도시이고, 인구도 2,300명 남짓이었다고 한다. 당연히 서로 잘 아는 사이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역시나 모범생(현재 이미지도 그렇지만) 이미지답게 중, 고등학교 6년 동안 ‘가장 학구적인 학생’으로 선정되었고, 1978에는 전교 차석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선생님들은 쿡에 대해서 “항상 무슨 일이든 맡길 수 있었다”라고 말할 정도로 강한 신뢰감을 보였다. 역시 지금의 쿡은 그냥 생긴 것이 아니었다.
이후 그는 앨리배마주 북부 도시에 있는 오번 대학에서 산업 공학을 전공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의 대학성적이다. 그의 교수 중 한 명은 쿡이 “견실한 B 플러스 내지는 A 마이너스 학생”이라고 말했다. 쿡은 천재가 아니었다. 우수한 학생은 맞았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쿡은 노력파였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좋아했다.
즉, 그가 공부만 열심히 한 학생은 아니었다. 쿡의 유머감각은 아주 뛰어나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 또래 다른 아이들처럼 장난도 곧잘 치고는 했다. 또한 그는 용돈을 벌기 위해서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했고 이를 통해서 비즈니스 감각을 키웠다.
반면 어릴 적 그에게 충격적인 일도 있었다. 그는 KKK 단원들이 흑인 소유의 사유지에서 십자가 화형식을 행하는 것을 봤다. 그것이 그의 뇌리에 박히고, 결국 차별을 없애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실제로 그의 집무실에는 두 명의 롤 모델의 사진이 붙어있는데, 한 명은 마틴 루서 킹이고 다른 한 명은 로버트 F. 케네디다.
그는 애플 CEO가 되면서 기부 활동에 본격적으로 동참했다. 사실 잡스는 기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좋은 애플 제품을 만드는 것이 ‘기부’라는 다소 이상한 논리를 폈다. 그 논리를 믿는 사람들도 있기는 있었다. 하지만 쿡은 보다 적극적인 기부를 시작했다. 회사 차원에서도 기부 활동을 장려했고, 개인적으로도 ‘휴먼라이크캠페인’에 꽤 많은 돈을 기부했다고 한다. 또한 환경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보여서 재생에너지를 본격적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그는 누구보다 노동과 노력의 가치를 믿었다. 그의 대학 풋볼 코치가 작성한 신조는 그에게 만트라가 되었다.
“나는 내가 현실세계에 살며 나 스스로 얻는 것에만 의지할 수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나는 노동과 노력의 가치를 믿는다.”
그가 1982년 5월 오번 대학을 졸업하고, 18개월 후 애플은 주식시장에 기업공개를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의 운명이 애플과 함께하리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당시 신흥 컴퓨터 왕국의 주자인 IBM에 입사했다. 그는 이 곳에서도 성실과 책임감, 리더로서 잠재력을 인정받았다. 그만큼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그의 상사가 중국에 출장 간 팀 쿡에게 새벽 두세 시쯤 메일을 보냈는데, 5분도 안돼서 답장이 왔다고 했을 정도다.
그는 이어서 듀크 대학의 야간 대학원에 등록해서 MBA 과정을 수료했다. 이 또한 자신의 미래를 안배한 처사였다. 그는 IBM에서 임원 자리에 오른 후 다른 회사로 이직했다. 아무래도 높은 연봉(1995년 25만 달러, 보너스 6만 7500달러) 때문이다. 그는 이후 콤팩으로 이직했고, 이 곳에서 본인의 장기인 공급망 관리를 훌륭히 수행했다.
결국 잡스는 그를 예의 주시하면서 스카우트를 제의했다. 당시 잡스가 구원투수로 나선 애플은 그다지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쿡은 이미 애플 인사팀의 영입 제안을 여러 번 거절했지만 잡스를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 잡스는 실리콘 밸리의 전설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잡스를 만나고 단 번에 그에게 매료되었다. 한 마디로 제대로 콩깍지가 씌웠다. 그가 컴팩을 떠나서 애플에 간다고 했을 때 모두들 두 손들고 반대했다. 하지만 그는 ‘실리콘 밸리’의 전설과 일하는 것을 일생일대의 특권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그는 애플과 인연을 맺었고, 마침내 2011년 CEO가 되었다. 그가 애플을 맡은 지 10년이 다 돼 가고 있다. 그동안 애플은 혁신적인 제품은 별로 나오지 않았지만 사업 기반을 확대하고 서비스를 강화했다. 중국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고, 아이폰, 아이패드, 맥, 애플와치 등을 하나로 묶는 생태계를 조성했다. 애플의 현금은 2672억 달러로 미국 정부의 현금 보유와 비슷할 정도다.
여전히 쿡에게는 많은 도전이 남았다. 경쟁사들의 추격은 맹렬하고, 그는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야 한다. 그래도 이제 더 이상 쿡을 잡스의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는 잡스의 세계관을 이어받아서 더 크고 넓게 키웠다. 아마 하늘에서 잡스가 흐뭇한 미소를 지을 것 같다. 그의 성공 비결은 자신이 믿는 바를 실천했다는 것이다.
“내가 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요. 그래서 내가 될 수 있는 최상의 팀 쿡이 되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